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우리
눈은 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장님일지도 모른다. 빛을 받아들이는 망막은 살아 있으나, 세상에 깃든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감각은 무뎌진 지 오래다. 보는 법을 잃어버린 눈은 차라리 감은 것보다 못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증명처럼 찍어내면서도, 그 너머의 의미를 붙잡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시각장애가 아니겠는가.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아침, 어떤 이는 눈부심을 탓하며 커튼을 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는 그 빛 속에서 새날의 약속을 본다. 같은 빛인데 전혀 다르게 읽힌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별개의 능력이다. 망막은 사물을 담지만, 마음은 그 사물의 노래를 듣는다. 마음의 눈이 닫히면, 아무리 밝은 대낮에도 세상은 캄캄하다.
거리에서 흔히 목격하는 풍경이 있다. 발밑에 들꽃이 피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계절은 꽃잎에 몸을 실어 인사를 건네는데, 우리는 알림 창 하나에만 몰두한다.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 발치에 흔들리는데도, 눈은 기계의 빛에 묶여 있다. 눈은 뜨여 있어도, 마음은 감긴 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환하게 웃는 얼굴 뒤의 쓸쓸함, 번듯한 옷차림 속에 숨어 있는 빈곤, 큰 목소리로 쏟아내는 말 뒤의 두려움을 우리는 좀처럼 보지 못한다. 겉모습만으로 단정 내리고, 소문 몇 줄로 상대를 다 아는 듯 치부한다. 웃고 있으니 행복하겠지, 잘 차려입었으니 부유하겠지, 목소리가 크니 자신감이 있겠지. 그러나 웃음이 가장 큰 가면일 때가 있고, 화려함은 외로움의 방패일 때가 많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볼 줄 모르면서, 눈이 멀쩡하다고 자부한다. 진짜 시각장애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때는 작은 것에도 감탄했다. 개미가 줄지어 움직이는 모습, 비 온 뒤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종이비행기가 그리는 궤적에도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우리는 점점 숫자와 성과, 외모와 지위 같은 잣대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계산하는 눈은 정확할지 몰라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흐려졌다. 맑던 동공은 점점 좁아져, 가슴을 울릴 만한 풍경을 담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세상의 색을 더 깊게 느끼는 이들이 많다. 손끝으로 책장을 읽고, 발자국 소리로 길을 짚으며, 바람의 결로 계절을 알아차린다. 우리가 놓치는 수많은 감각을 그들은 귀와 피부와 마음으로 살아낸다. 눈이 아닌 심장으로 본 풍경이 얼마나 선명한지, 그들의 말 한마디에서 알 수 있다. “오늘은 맑네요.” 그 소박한 인사 속에는 햇빛의 무게, 바람의 흐름, 공기의 투명함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저 날씨 앱을 확인하며 숫자만 읽는다. 누가 더 장님일까.
그렇기에 우리는 시각장애를 조롱하거나 비난할 자격이 없다. 우리 역시 이미 아름다움을 보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앞의 돈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외모나 직업으로 가치를 매기며, 편견의 장막을 자처해 씌운다. 욕망이야말로 우리 눈을 가리는 장님막이다. 눈은 뜨였으나, 빛을 해석할 능력은 상실된 것이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마지막으로 진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단순히 풍경을 스쳐간 게 아니라, 온몸으로 새기며 가슴에 새겨 넣은 순간. 오래전 버스 창문 너머로 보았던 석양이 떠오른다. 하늘이 저렇게도 불타오를 수 있다는 사실에 숨조차 멎었던 그때. 설명도 필요 없고, 이유도 필요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만했던 순간.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눈을 제대로 사용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매일같이 수많은 장면을 지나가지만, 머릿속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사진첩 속에는 이미지가 넘쳐나는데, 마음속 풍경은 빈약하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찍은 사진, 증명하기 위해 보는 시선, 과시하기 위해 쏟아내는 장면들. 정작 나 자신을 위해 바라본 순간은 드물다. 이것 또한 시각장애다.
시각장애라는 단어는 흔히 결핍을 뜻한다. 그러나 정말로 결핍은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눈으로만 본다고 해서 풍요로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힘은 눈동자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눈을 감아도 꽃향기로 계절을 알 수 있고, 손끝의 온기로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귀를 기울이면 세상의 숨결이 들려온다. 결국 진짜 보는 힘은 외부의 빛이 아니라 내부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서로의 눈이 되어줄 수도 있다. 보지 못하는 이를 위해 길을 안내하듯, 누군가의 마음을 놓치지 않고 바라봐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본다’는 행위일지 모른다. 잊힌 풍경을 다시 전해주고, 사소한 아름다움을 다시 불러오는 것. 그렇게 서로의 시선을 채워줄 때, 우리는 진짜 인간이 된다.
한 번쯤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혹시 나는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길가에 매달린 매미의 노래,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투명한 울림, 스쳐 지나가던 이의 축 처진 어깨. 모두가 눈앞에 있었지만, 나는 외면했다. 보는 법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러나 그들을 볼 수 있다면, 삶은 훨씬 다채롭게 빛날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의지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우리가 눈을 열지 않으면 결코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마음의 동공을 넓히고, 사소한 것에도 시선을 주며, 타인의 내면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는 시력을 회복한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작 아름다움을 보는 법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이도 시각장애를 조롱하거나 비난할 권리는 없다. 눈을 감고도 세상의 빛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 있고,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우리가 있다. 누가 진짜 장님일까. 나는 오늘도 그 질문을 안고, 다시 세상을 바라본다. 눈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그 눈으로 본 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