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조각을 삼킨 듯한 나의 음성
혹시 녹음된 자기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나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 남아 있던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을 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소리가 내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던 경험 말이다. 나는 그런 순간마다 얼어붙는다. 내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아는 내가 아니다. 꾀꼬리처럼 예쁘장하게 울리지도 않고, 듣는 이를 웃게 만드는 귀염성 있는 음색도 없다. 대신 허스키한 쇳소리, 어딘가 중성적인 울림이 목을 긁으며 흘러나온다.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부드러운 매력과도 거리가 멀다. 그래서 한때 현영의 목소리가 부러웠다. 그녀의 말투에는 생기와 리듬이 있었고, 듣는 사람의 기분을 한껏 끌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늘 낡은 바이올린처럼 삐걱대며 나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에 대해 특별히 예쁘다거나 매혹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괜찮은데 왜 신경 써?” 혹은 “평범한 목소리야”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나에겐 그 평범함조차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 귀에는 쇳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음색만 들렸고, 그 소리를 내뱉는 순간마다 스스로의 존재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목소리는 참으로 묘하다. 얼굴은 거울에 비추어 확인할 수 있고, 글은 써 내려가며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내가 내뱉는 순간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타인의 귀에 남은 뒤 사라져 버린다. 나는 그 울림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목소리에 관한 불안은 늘 예민하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거칠게 들리진 않을까, 혹은 힘없는 소리로 흘러가 버리지 않을까. 말끝마다 뒤돌아보듯, 나는 내 목소리를 의심한다.
어린 시절, 교실에서 책을 읽게 하면 유난히 괴로웠다. 문장보다는 내 음색에 온 신경이 쏠렸다.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 몰라도, 내 귀에는 교실 전체가 내 소리로 채워진 듯 울렸다. 아이들이 웃지 않아도 웃음을 들은 것만 같았고, 선생님이 칭찬해도 얼굴은 화끈거렸다. 목소리는 나를 묶어두는 족쇄였다.
성인이 된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화를 걸기 전, 머릿속에서 인사말을 수십 번이나 연습한다. 하지만 막상 버튼을 누르면 목소리는 언제나 내 예상을 배반한다. 때론 지나치게 높게 튀고, 때론 낮게 깔려 흐려진다. 상대방이 잠시 말을 멈추는 순간조차 내 발음이 어색해서일 거라 짐작한다. 내 목소리는 늘 내 의도를 배신하는 고집 센 그림자다.
나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부러워한다. 어떤 이는 허스키함을 매력으로 가진다. 어떤 이는 맑은 음색으로 듣는 이를 감싸 안는다. 텔레비전 속 밝은 여성들의 경쾌한 말투는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내 음성은 같은 허스키함조차 매력이 아니라 결점처럼 들린다.
목소리는 영혼의 창문이라는 말이 있다. 바람이 문틈으로 스며들며 그 집의 기운을 드러내듯, 목소리는 내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내가 내 목소리를 싫어하는 건, 어쩌면 내 안의 나를 미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성스럽지 못한 울림을 탓하면서, 그 소리를 내는 나 자신까지도 거부한 건 아닐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타인의 목소리에는 너그러웠다. 발표 자리에서 떨리는 목소리도 귀엽다고 생각했고, 거친 톤조차 어떤 이에게선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싫어하는 요소들이 타인에겐 매력이 된다는 사실은 늘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혹시, 내 목소리도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들리지 않을까. 내가 쇳소리라며 부끄러워한 울림이 누군가에게는 진솔한 마음으로 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차분하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심지어 따뜻하다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말이 낯설고 믿기 어려웠지만, 동시에 묘한 위로가 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들린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이 목소리로 기록됐다. 울음도, 웃음도, 사랑의 고백도, 미움의 토로도 결국 이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싫다며 밀어내도, 내 삶의 대화와 기록은 목소리라는 잉크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버릴 수 없는 그림자처럼 내 뒤를 따라다닌다.
어머니의 자장가, 아버지의 거친 톤, 친구들의 웃음 섞인 말투. 나는 그 목소리들 속에서 위로받고 살아왔다. 그렇다면 내 목소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싫다고 여겨도, 그 소리는 이미 타인의 삶 속에 파문처럼 번져나갔을 것이다.
내 목소리가 너무 싫다며 중얼거리던 시간조차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 불안과 수치심으로 얼룩졌던 말들이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소리가 아니어도 괜찮다. 매끄럽지 않아도, 살아 있다는 증거로 흘러나온 울림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여전히 내 목소리를 사랑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이려 한다. 이 목소리 덕분에 내가 누군가와 이어지고, 하루가 기록되며, 마음이 전해진다. 싫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사실 이 목소리에 고마워하고 있다. 불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내 목소리다.
오늘도 나는 내 목소리가 너무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싫음 속에서 나는 나를 더 깊이 이해한다. 어설프고 서툴더라도 결국 이 목소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언젠가 이 음성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따뜻한 파동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제는 믿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