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야 다시 설 수 있다
모든 게 무너지는 순간에도,
나는 서 있었다.
눈앞은 번개로 하얗게 찢기고,
세상은 마치 날 버린 듯 흔들렸다.
그때 나는 몰랐다.
바람이 나를 구할 줄은.
바람은 잔인했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을 잡아끌며,
억눌러둔 기억들을 하나씩 찢어냈다.
오래된 후회, 미안함,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
모두 폭풍 속에서 되살아났다.
나는 그 언덕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곳은 한때 평화로운 들판이었다.
봄이면 라일락 향이 흘렀고,
여름이면 풀벌레들이 합창했다.
그 언덕엔 나의 모든 청춘이 묻혀 있었다.
그리고 나의 첫사랑도.
그 사람은 늘 바람을 닮았다.
잡을 수 없고,
그러면서도 나를 살아있게 했다.
“다 괜찮을 거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이 될 줄은 몰랐다.
그 후로 나는 자주 그 언덕에 올랐다.
마치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듯.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가 함께 웃던 자리에 서서
젖은 풀잎을 쓰다듬곤 했다.
그 손끝이 아직도 따뜻했다.
삶은 그 후로 자꾸만 요동쳤다.
사람들은 떠나고,
약속은 흩어지고,
나는 점점 무너져갔다.
그래서 언덕으로 향했다.
폭풍이 몰려오는 날이면 언제나.
그 언덕은 내게 피난처였다.
하지만 동시에 고백의 장소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들을
나는 바람에게 맡겼다.
그 바람은 내 울음을 데려가고,
다시 새로운 숨을 데려왔다.
살다 보면 누구나 폭풍을 만난다.
예고도 없이, 이유도 없이.
그건 불행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사실을 늦게야 배웠다.
폭풍은 내게 말했다.
“도망치지 말라.
너의 무너짐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 말이 마음에 꽂혔다.
그래서 나는 서 있었다.
비바람 속에서도, 끝까지.
하루하루가 힘들던 시절이 있었다.
일도, 관계도, 마음도 모두 엉망이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말했다.
“시간이 약이야.”
하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시간은 아무것도 고쳐주지 않았다.
나를 치유한 건 시간이 아니라,
폭풍이었다.
끝까지 흔들리고, 부서지고,
그 속에서 비로소
내 진짜 마음을 마주했다.
그건 고통이 아니라 깨어남이었다.
폭풍 속의 언덕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내 안의 두려움과 용기,
사랑과 증오가 맞부딪히던 자리.
그곳에서 나는 수없이 무너지고
또다시 일어났다.
그게 삶의 방식이었다.
어느 날은 바람이 잔잔했고,
어느 날은 너무 거세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고요보다 폭풍이 나를 숨 쉬게 했다.
사람들은 늘 평온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평온은 폭풍을 통과한 자만의 선물이라는 걸.
고요는 태풍의 눈 속에서만 진짜였다.
그걸 모르던 시절의 나는
늘 도망만 쳤다.
이제는 다르다.
바람이 불면 창문을 연다.
빗소리가 들리면 불을 끈다.
그리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하다.
아마, 언덕일 것이다.
그 언덕은 말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기억한다.
내가 울던 자리,
내가 웃던 자리,
내가 사랑하던 사람의 그림자까지도.
모두 바람 속에 남아 있다.
가끔은 다시 그 언덕에 오른다.
하늘은 여전히 낮게 깔리고,
풀잎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린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건,
이제 나는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폭풍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나는 안다.
모든 폭풍은 결국 지나간다는 걸.
그 자리에 남는 건
무너진 흔적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다.
그게 인생의 진짜 얼굴이었다.
언덕 위에서 나는
나 자신과 화해했다.
사랑했던 이도, 잃었던 날들도,
모두 그 폭풍이 데려온 선물이었다.
이제는 미워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살아낸다.
바람이 다시 분다.
하늘은 어둡지만, 마음은 밝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빛나는 하늘을 본다.
그리고 속삭인다.
“괜찮아, 나 이제 무너지지 않아.”
폭풍 속의 언덕.
그곳에서 나는 끝없이 쓰러지고,
끝없이 일어났다.
그 언덕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서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은 여전히 나를 스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서 있다.
폭풍 속의 언덕 위에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며.
삶의 모든 질문에 답하듯이.
무너져야, 비로소 서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