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대신 음악을 켠다
혼자 있는 집은 너무 조용하다.
그 조용함이 때로는 벽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늘 TV를 켠다.
재즈가 흐르거나, 팝송이 잔잔히 깔리거나, 드라마가 흘러간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소리’가 필요하다.
적막이 싫어서.
소리가 켜져 있으면, 내 하루도 조금은 살아 있는 것 같다.
거실의 불빛 아래서 하루를 정리한다. 월·수·금, 내 루틴의 날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밀고, 걸레를 짠다.
이 일정은 나의 달력보다 정확하다.
누군가는 이런 반복을 지루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반복 속에서 나를 다시 세운다.
먼지가 쌓인 바닥을 닦을 때마다 마음의 찌꺼기도 함께 닦인다.
걸레 끝이 닿는 곳마다 생각이 맑아지고, 손끝이 물에 젖을 때마다 마음도 조금 부드러워진다.
햇빛이 바닥에 번지면 그 빛을 따라 걱정도 서서히 옅어진다.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바닥만큼은 내 손으로 반짝일 수 있다.
그 작디작은 통제감이 내 마음을 안정시킨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진동이 집 전체를 울릴 때,
그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들린다.
삶은 결국 이런 소음으로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계속 돌아가는 것들로.
청소를 마치면 자전거를 탄다.
실내지만, 나에게는 가장 먼 여행이다.
페달을 밟는 동안 방 안은 점점 사라지고,
숨과 리듬만이 남는다.
처음엔 힘들었다. 다리가 떨리고, 시간은 질질 늘어졌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 고통이 예측 가능해졌다.
예측 가능한 고통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그때부터 루틴은 나를 단련시키는 무기가 되었다.
페달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생각이 하나씩 정리된다.
“Consistency is the key.”
리얼클래스 라이브에서 들은 문장이 머릿속에 맴돈다.
꾸준함, 그것이 핵심이라는 말.
그 문장은 내 하루의 주제이기도 하다.
운동이 끝나면, 땀에 젖은 몸으로 창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TV에서는 여전히 재즈가 흘러나오고,
컵에는 미지근한 물이 반쯤 남아 있다.
그 순간, 고요와 소음이 묘하게 섞인다.
그 사이에 내가 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리얼클래스 라이브를 켜고, 노트를 펼친다.
화면 속 선생님이 영어 문장을 읽는다.
나는 그 문장 뒤를 따라 읽는다.
발음이 틀려도 괜찮다. 이건 시험이 아니라 루틴이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면,
그건 오늘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책상 옆 TV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흐른다.
비트와 발음이 섞이며 묘한 리듬을 만든다.
집안일의 리듬, 사이클의 리듬, 공부의 리듬,
그 모든 리듬이 모여 내 하루를 만든다.
루틴은 내 삶의 배경음이다.
오후가 되면 밖으로 나간다.
만 보.
그건 나와의 약속이자, 하루의 마침표다.
걷는 동안 머릿속은 하나씩 비워진다.
오늘의 대화, 지나간 후회, 아직 오지 않은 걱정들.
그 모든 게 발자국 아래 눌려 사라진다.
햇살은 길게 늘어지고, 바람은 어제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걸음이 쌓일수록 생각은 단순해진다.
복잡했던 마음이 평평해진다.
길을 걷다 보면,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다.
언젠가부터 나는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없는 루틴이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해가 져 있다.
문을 열자마자 재즈가 다시 나를 맞이한다.
낮보다 조금 더 느린 템포, 깊은 음색.
그 소리 속에서 나는 샤워기로 향한다.
뜨거운 물이 어깨를 덮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다.
비누 향이 퍼지고, 수증기가 거울을 흐린다.
그 속의 나는 조금 지쳐 있지만, 또 조금 단단하다.
오늘의 루틴이 나를 지켜냈다는 확신이 든다.
머리를 말리며 거실로 돌아오면,
TV는 여전히 켜져 있다.
화면엔 엔딩 크레디트가 흐르고,
재즈는 점점 잦아든다.
이 소리들이 나를 대신 숨 쉬는 듯하다.
적막 대신 음악을 켜놓고,
혼자이지만 고요하지 않은 밤을 맞는다.
누군가는 묻는다.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가 지겹지 않아?”
나는 웃는다.
“이 루틴이 있어서 내가 무너지지 않는 걸.”
청소는 내 마음을 닦는 일,
운동은 내 중심을 세우는 일,
걷기는 내 생각을 비우는 일,
공부는 내 미래를 여는 일,
샤워는 나를 새로 시작하게 하는 일.
루틴은 나를 묶는 틀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질서다.
밤이 깊어가면, 불을 끄기 전 마지막으로 재즈를 끈다.
공간은 조용해지고, 마음은 따뜻해진다.
오늘도 같은 리듬으로 살아냈다는 안도감.
그건 작지만 확실한 위로다.
적막한 세상 속에서도,
내가 할 일을 알고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내일도 같은 루틴으로 하루를 쌓아갈 것이다.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TV를 끄고 불을 낮추며 속삭인다.
“수고했어, 오늘도.”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내일도, 나는 적막 대신 음악을 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