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의 맑음

젖은 마음의 투명함

by Helia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울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울음인지, 고백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도망치기엔 너무 깊고,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그렇게도 내리 쏟아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걷힌다.
햇살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능청스럽다. 이 변덕쟁이를 어찌할꼬.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다.
왜냐면 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울고 나서야 다시 웃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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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흘러내린 유리창 위로 햇빛이 번진다.
그 빛은 단순히 환한 게 아니라, 어딘가 투명하다.
비가 씻어낸 세상은 언제나 조금 더 맑다.
마치 눈물 뒤의 얼굴처럼, 조금은 초라하지만 진실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아직 마르지 않은 세상을 바라본다.
지나간 것들은 흙탕물처럼 바닥에 가라앉고,
그 위로 새로운 하늘이 비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울음이 가라앉은 뒤에야, 비로소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비가 그치는 순간은 언제나 묘하다.
그침은 끝이 아니라, 다음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흔히 비를 싫어하지만,
나는 그 비를 사랑한다.

비는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마음의 불필요한 말들을 지워준다.
누군가를 용서하기보다,
그저 놓아주는 법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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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비가 오면 자주 밖으로 뛰쳐나가곤 했다.
우산도 없이, 신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빗물 속에서 뛰놀던 그때의 나는 자유로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나야말로 가장 ‘현재’를 사는 인간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나는 비가 내리면 창문을 닫는다.
바깥세상의 소란이 들끓는 게 싫어서.
하지만 가끔은, 그 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싶을 때.

비는 나를 숨기고, 세상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프지 않다.
눈물이 섞여도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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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릴 때마다 나는 기억을 닦는다.
마음속 먼지를 훔치듯,
이름 모를 감정들이 스며나온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얼굴들,
놓쳤다고 믿었던 시간들이
빗물 속에서 하나둘 떠오른다.

어쩌면 비는, 잊지 말라는 신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한 번 젖은 마음은 쉽게 마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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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말이 없다.
모든 게 새것처럼 느껴진다.
습기 속에 남은 냄새들이 뒤섞인다.

젖은 아스팔트의 냄새,
빵집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버터 향,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샴푸 냄새.
그 모든 냄새가, 세상이 다시 살아났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파란색이 이렇게도 투명했나 싶다.
그 속에는 아직 흰 구름이 남아 있고,
어딘가엔 무지개가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다시, 조용히 숨을 고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모든 고요는, 한바탕 울고 난 뒤에야 오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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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갑작스러운 폭우처럼, 아무 예고 없이 쏟아지는 슬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손실과 무너짐.

누군가를 잃고, 꿈을 잃고, 믿음을 잃을 때.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뇐다.
이건 비다.
그저 조금 오래 내릴 뿐이다.

모든 비는 언젠가 멈춘다.
그건 자연의 순리이자, 삶의 리듬이다.
우리의 슬픔도 언젠가 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치기 전까지는 흠뻑 젖어야 한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맑음은, 완전히 젖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젖는다는 건 감정을 끝까지 통과한다는 뜻이니까.
그 통과의 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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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의 세상은 이전과 다르다.
색이 달라지고, 냄새가 바뀌고, 공기가 새로워진다.
빛이 땅에 닿는 각도조차 변한다.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는 건,
비를 견딘 자들뿐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에도 ‘맑음의 빛’이 있다고.
아무리 깊은 상실 속에서도,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빛.
그건 사랑이 남긴 잔향이자,
희망이 남긴 흔적이다.

우리는 그 불빛을 따라 걷는다.
때로는 더디고, 때로는 비틀거리며.
그러다 문득, 비가 멈춘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그 모든 어둠이 사실은 길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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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완전히 돌아오자, 세상은 분주해졌다.
빗자루를 든 아주머니가 골목을 쓸고,
아이들이 웅덩이를 밟으며 소리 내 웃는다.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삶이란 결국, 젖었다가 마르는 일의 반복이라는 걸.
지워지고 다시 쓰이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투명해진다.

그 투명함은 상처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품은 채로 빛을 통과시키는 능력이다.
비 온 뒤의 맑음은, 바로 그런 투명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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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다시 구름이 몰려온다.
하루의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세상은 잠시 어둠을 허락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두렵지 않다.

비는 또 올 것이다.
하지만 그 비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리라는 걸 아니까.

나는 창문을 닫지 않는다.
대신, 바람을 들인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맑겠지.”

그 말은 다짐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모든 폭우는 결국, 누군가의 맑은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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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뒤, 나는 잠시 멈춰 선다.
하늘은 새로 씻긴 듯 푸르고,
물방울이 아직 반짝이는 거리엔
낯선 평화가 내려앉는다.

세상은 조금 젖었고,
나도 조금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아주 미세하게 느꼈다.

이 세상 모든 비는,
결국 나를 더 깊은 빛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길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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