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가 자주 와.

젖지 않으려 애쓰는 날들

by Helia

요즘은 비가 자주 온다. 좋다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비가 내리면 놀이터는 진흙탕이 되었고, 운동장에는 물이 고였다.
한 손엔 신발주머니, 한 손엔 우산.
양손 가득 들고 다니는 게 세상 귀찮았다.
발끝엔 물이 스며들고, 양말은 젖어 눅눅해졌다.
비 오는 날이면 꼭 교문 앞에서 우산을 접으며 욕이 나왔다.
그때부터였다.
비는 나에게 낭만이 아니라, 불편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누군가는 빗소리를 듣고 위로받는다고 한다.
나는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위로가 아니라 소음이다.
똑, 똑, 똑.
같은 소리가 하루 종일 반복된다.
처음엔 괜찮다가도, 어느 순간 머리가 지끈거린다.
창문을 닫자니 답답하고, 열면 공기가 눅눅하다.
피할 수 없는 딜레마.
그게 비다.

어릴 적 장마철엔 늘 비닐우산이 뒤집혔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비를 피하다 보면 바지 끝은 이미 젖어 있었다.
신발 안쪽이 축축한 채로 하루를 보내던 기억.
그게 내 비의 첫 기억이다.
사람들은 그걸 추억이라 부르겠지만, 나에겐 불쾌감 그 자체였다.
젖은 냄새, 고무장화의 끈적함, 하수구 냄새가 뒤섞인 공기.
그 속에서 낭만을 찾을 여유는 없었다.

커서도 다르지 않다.
비가 내리면 머리는 눅눅해지고, 기압은 낮아지고, 몸은 무겁다.
세상 전체가 눅눅하게 눌려 있는 것 같다.
제습기를 돌려도 벽지가 숨을 쉬지 않는다.
하루 종일 눅눅한 공기 속에서 사람의 표정도 느려진다.
다들 우산 아래 숨어 걷는다.
서로 눈도 안 마주친다.
하늘도, 사람도, 모두 젖은 얼굴로 움직인다.
그 풍경이 싫다.
기분까지 휘청거린다.

비는 언제나 갑자기 온다.
날씨 예보는 틀리고, 사람들은 허둥댄다.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로 하늘을 막아보겠다는 게 인간의 고집이다.
우린 결국 젖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신발 끝이 먼저 젖는다.
세탁소 앞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이 그렇게 미워 보일 때가 있다.
세상은 자꾸 씻어내려 하고, 나는 그 속에서 젖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예쁘게 찍는다.
비가 번진 간판 불빛, 젖은 유리창 너머의 거리, 커피잔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그런 사진들이 인기라지만, 나에게는 그저 축축한 현실이다.
낭만을 붙이려 애쓰는 사람들의 표정이 오히려 안쓰럽다.
비는 그런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는 그저 내릴 뿐이다.
젖은 신발, 무거운 가방, 눌어붙은 머리카락, 그런 게 진짜다.

요즘 가을비는 유난히 오래 내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제습기 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빗소리와 제습기 소리, 두 소리가 겹치면 머리가 아프다.
커튼을 치고 누워도 습도는 여전히 높다.
이불속까지 공기가 스며든다.
눅눅한 이불은 차갑고, 마음은 그보다 더 차갑다.

그럴 땐 그냥 가만히 누워 있는다.
비 오는 날엔 의욕이 없다.
책을 펼쳐도 글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음악을 틀어도 소리가 벽에 붙는다.
하루가 길게 느려지고, 시간은 젖은 수건처럼 늘어진다.
누군가는 이런 날씨를 ‘여운 있다’고 하지만,
내게는 그저 ‘불편하다’가 맞다.

비는 늘 사람을 방 안에 가둔다.
밖으로 나가면 젖고, 안에 있으면 눅눅하다.
어디에도 완벽한 곳이 없다.
비는 그걸 알려준다.
완벽한 공간 따윈 없다고.
결국 사람은 조금 젖은 채로 살아야 한다고.

그래도 비가 완전히 그친 다음의 공기는 좋다.
물에 씻긴 세상이 잠시 반짝인다.
빗물이 말라가는 길 위로 햇살이 반사되면, 그때서야 조금 안도한다.
비가 고마운 건 아니다.
그저 끝났다는 사실이 좋을 뿐이다.
젖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돌아왔다는 것.
그게 내겐 평화다.

하지만 그 평화는 길지 않다.
며칠 지나면 또 비가 내린다.
요즘은 유난히 그렇다.
하루 이틀 비가 오면 그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연달아 내린다.
달력엔 아직 10월인데, 공기엔 이미 겨울의 냄새가 섞였다.
낙엽이 비에 젖어 색을 잃고, 골목길은 미끄럽다.
비는 나를 집 안에 붙들어두고, 세상은 그 사이에 멀어진다.

비가 자주 오면 사람도 조금씩 변한다.
말이 줄고, 표정이 무뎌진다.
감정이 눅눅해지면 판단도 흐려진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가급적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한다.
감정도, 의욕도, 젖으면 말리기 어렵다.
그냥 덜 느끼고 덜 상하는 쪽을 택한다.

가끔 창문을 바라본다.
유리 위를 따라 흐르는 빗방울이 합쳐졌다가 흩어진다.
그걸 보다 보면 사람의 인연도 저렇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잠깐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지는.
남는 건 자국뿐이다.
그 자국이 마르기 전, 또 다른 비가 내린다.

요즘 가을비가 자주 온다.
하늘은 낮고, 마음은 그보다 더 낮다.
밖은 젖고, 나는 마른 채로 남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비는 언제나 자기 할 일을 한다.
내가 싫다고 멈춰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냥 버틴다.
젖지 않으려 커튼을 치고, 제습기를 돌리고, 담요를 덮는다.
그게 내 방식의 저항이다.
세상이 젖을수록 나는 마르기로 한다.
그렇게 오늘도 눅눅한 공기 속에서 버틴다.
비가 그칠 때까지,
이 계절이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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