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선율
삶을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길에는 언제나 책 한 권, 노래 한 곡, 그리고 영화 한 편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취향의 기록일지 몰라도, 내게 그것들은 계절의 얼굴이었고, 사람보다 오래 남은 기억이었다. 어떤 날은 문장이 내 손을 잡았고, 어떤 날은 노래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으며, 어떤 날은 스크린 속 인물이 내 마음을 대신 울어주었다. 그 셋은 내 인생의 배경이자,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 숨이었다.
책은 내게 세상을 여는 첫 문이었다.
처음 책을 좋아하게 된 건 아주 어릴 적이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며, 나는 ‘제제’라는 작은 아이를 통해 처음으로 마음의 깊이를 배웠다. 라임오렌지나무에게 말을 걸던 제제의 모습은 내 어린 시절과 닮아 있었다. 혼자서도 대화를 나누고, 외로움을 다독이며, 세상을 배워가던 그 아이. 나는 그를 통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의 아픔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럼에도 세상이 얼마나 따뜻할 수 있는지를 동시에 느꼈다. 책이란 결국, 누군가의 슬픔을 내 마음에 옮겨 심는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로 책은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길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며 나는 ‘나’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의식했다. 남들이 정해둔 길 위에서 걸으며 살아가던 내가, 스스로를 낯설게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문장을 읽던 순간, 나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린 왕자』를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배웠고, 『연금술사』를 통해 길을 잃는다는 것이 곧 길을 찾는 일임을 깨달았다. 책은 늘 나보다 먼저 나를 이해해 주었다.
책이 생각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면, 음악은 감정의 숨을 불어넣었다.
음악은 언제나 내 마음의 언어였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노래의 가사와 선율 속에서 살아났다. 어느 봄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를 처음 들었다. “바람에 날려버린 먼지 되어, 너에게로 간다.” 그 한 줄이 내 마음을 고요히 휘감았다. 그 노래를 듣던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했는지도, 이미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 선율이 가슴을 조용히 스쳐 지나갈 때, 세상의 모든 이별이 한 곡 안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음악은 그렇게 슬픔을 아름답게 번역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떤 날엔 마음이 텅 비었다가도, 아이유의 ‘밤편지’를 들으면 다시 온기가 스며들었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그 노래는 조용히 속삭이듯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직접적인 위로보다, 아무 말 없이 함께 앉아주는 온기가 느껴졌다. 음악은 늘 그랬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확히 내 마음의 온도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감정을 대신 말해줄 때,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기억 속에서 가장 선명한 장면 하나는 여름 저녁의 LP바다.
창밖에는 비가 내렸고, 유리잔에 맺힌 조명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에릭 클랩튼의 ‘Wonderful Tonight’이 흘러나오던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노래는 그 자체로 시간이었다. 낯선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섞여 들어가던 그 선율은 내 마음 깊은 곳의 어둠까지 비춰주었다. 지금도 그 곡을 들으면 그 여름의 냄새와 공기, 그때의 내가 다시 되살아난다. 음악은 그렇게 기억을 감정으로 저장한다. 냄새보다 오래 남고, 말보다 정확하다.
그리고 영화.
영화는 내 인생의 또 다른 창이었다. 처음으로 스크린 앞에서 울었던 건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아들을 웃게 하려던 아버지의 유머와 사랑은 내게 ‘진짜 강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날 이후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이 되었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며 기억과 사랑의 역설을 배웠고, 『비포 선라이즈』 속의 대화는 인간이 얼마나 짧은 순간 속에서도 진심을 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꿈과 사랑이 항상 같은 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여운은 마치 재즈 선율처럼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내 감정의 대리인이었다. 그들의 후회, 그들의 눈빛, 그들의 선택이 내 안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다.
책이 나를 생각하게 했다면, 음악은 느끼게 했고, 영화는 바라보게 했다.
책은 머리로, 음악은 가슴으로, 영화는 눈으로 세상을 보여줬다.
그 셋이 나란히 서 있을 때, 나는 조금 더 인간다워졌다.
살다 보면 누구나 혼자가 된다.
대화가 멈춘 밤, 연락이 끊긴 친구, 떠나간 사람들. 그 고요의 틈을 메워준 건 언제나 이 셋이었다.
책은 내 손을 잡고, 음악은 내 어깨를 감싸며, 영화는 내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 셋이 내 마음의 불빛이었다.
외로움이 어둠이라면, 그들은 내 안의 작은 등불이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조급하게 읽거나 듣지 않는다.
모든 걸 놓치지 않으려 허둥대던 시절은 지나갔다.
지금은 천천히, 오래 머무는 법을 안다. 한 문장을 곱씹고, 한 곡을 반복해 듣고,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
그때마다 새로움이 피어난다. 세상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책을 덮을 때 남는 문장 하나,
음악이 끝나고도 귓가에 맴도는 한 소절,
자막이 다 올라가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
그 모든 것이 내 삶의 잔향이 된다. 그것이 ‘함께했던’ 것들의 마법이다.
돌아보면, 내가 성장한 이유는 결국 사람보다도 이 셋 덕분이었다.
책은 나를 깨닫게 했고, 음악은 나를 위로했으며, 영화는 나를 이해하게 했다.
그들은 내가 울 때 함께 울었고, 내가 웃을 때 함께 웃었다.
그 덕분에 나는 무너진 자리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내가 쓴 문장이, 내가 고른 노래가, 내가 추천한 영화가 누군가의 하루를 덮어주는 담요가 되길.
책이 내게 사유의 깊이를, 음악이 감정의 언어를, 영화가 시선의 따뜻함을 알려주었듯이.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이 셋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결국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진짜로 ‘함께했던’ 건 책도, 음악도, 영화도 아닌 그 순간의 ‘나’였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던 나, 노래를 듣던 나, 스크린 속에서 울던 나.
그 모든 나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장을 넘기고, 노래를 틀고, 영화를 건다.
그 속엔 언제나 내가 있고, 나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