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 아니었다.
그땐 내가 아니라 내가 죄인인 줄 알았다.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도,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서 먼저 나왔다. 누군가의 얼굴이 구겨지는 게 싫어서,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게 싫어서, 늘 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내가 잘못한 게 맞다는 듯이. 그렇게 내 삶은, 내 죄 아닌 죄로 얼룩져 있었다.
처음엔 그게 어른스러움이라고 믿었다. 싸움을 피하고, 문제를 덮고, 분위기를 지키는 게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알게 됐다. 그건 성숙함이 아니라 굴종이었다. 누군가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그들의 비겁함을 내 탓으로 감싸 안는 일이었다. 그게 착한 일인 줄 알았지만, 결국 손해만 보는 바보였다.
당신들은 늘 그렇게 말했다.
“넌 예민해.”
“그런 건 그냥 넘어가면 되잖아.”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그 말들에 내 마음은 늘 주춤했다. 정말 내가 예민한 걸까, 너무 감정적인 걸까, 그렇게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예민했던 게 아니라 정확했던 거였다.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느낀 게, 틀린 게 아니었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틀림이 아니라 정직함이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그 정직함이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비치는 거울 같았을 테니까. 그래서 내 진심을 감정 과잉으로 몰았다. 감정적이고, 까다롭고, 문제를 키우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손쉽게 내 탓으로 돌렸다. 당신들의 책임은 어느새 내 몫이 되었고, 내 입에서는 또 미안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었다는 걸. 잘못하고도 모른 척하던, 사과 대신 침묵을 택하던, 책임을 떠넘기던 당신들 말이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잘못했으면 사과할 줄 알아야지. 왜 그런 기본도 못 지키면서 남을 가르치려 드는가.
요구르트도 아니고, 왜 그렇게 쉽게 넘겨요?
한 숟갈 툭 떠서 남에게 건네듯, 죄책감과 책임을 던지던 그 손길이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다. 그땐 내가 받아줘야 일이 끝날 줄 알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게 시작이었다는 걸. 당신들은 내 침묵을 약속처럼 여겼다. 내가 참을수록, 당신들은 더 무겁게 떠넘겼다.
내가 늘 미안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말이 내 방패였고, 동시에 족쇄였다. 하지만 진짜 어른이 되는 건, 더 이상 엉뚱한 데서 고개 숙이지 않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안다. 잘못이 아닌 일엔 미안할 필요가 없다. 그건 내 마음을 지키는 최소한의 존엄이다.
사람은 잘못할 수 있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실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은 비겁해진다. 내가 이제 그 비겁함을 구분할 줄 안다. 말의 향기와 냄새로, 진심과 핑계를 구별할 줄 안다.
예전엔 그 냄새를 몰랐다.
달콤한 말속에 숨은 책임 회피를, 예의로 포장된 무례함을, 한참 뒤에야 알아차렸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순했고, 어쩌면 너무 착했다. 하지만 착함과 멍청함은 다르다. 착함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지만, 멍청함은 내 자신을 잃어가는 순종이다. 이제 내가 멍청하지 않다는 걸, 확실히 안다.
당신들이 내게 “참아라”라고 했던 말은 결국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그 말 뒤에는 당신들의 편안함이 있었다. 내 상처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당신들의 평화를 위해 내가 희생되어야 했다. 그게 어른들의 방식이라면, 내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겠다.
이제 내가 말한다.
“제 말,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
그 한마디에 지난 세월이 다 담겨 있다. 억눌린 분노, 미뤄둔 억울함, 삼켜버린 말들, 그 모든 게 터져 나온다. 당신들은 여전히 듣지 않겠지. 이해할 마음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내가 내 마음을 이해하니까.
이제 내 감정의 주인은 내다.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느낀 불쾌함이 진짜다. 내가 느낀 상처가 가짜일 리 없다. 내가 겪은 일은 내 현실이고, 그것을 부정당할 이유도 없다. 내 마음을 무시하는 사람에게 웃어줄 필요도, 그들의 표정을 살필 이유도 없다.
지금의 내는 예전보다 단단하다. 단단함은 목소리가 커지는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억울함을 삼키지 않고, 부당함을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 내가 그걸 배웠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조금만 더 당당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런 후회조차 이제는 미소로 바뀐다. 그때의 내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억눌리고, 무시당하면서도 버텼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시절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내 마음을 함부로 흔들지 못한다. 내가 무너지는 건 내 선택이어야지, 타인의 무책임 때문이 어선 안 된다. 내가 감당해야 할 건 오직 내 잘못뿐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당신들이 남긴 말, “넌 참 착하네.”
이젠 그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건 결국 “당신은 참 이용하기 쉬운 사람이야”의 다른 표현이었다. 착하다는 말 뒤에 감춰진 무게를 이제는 안다. 그래서 더 이상 착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단단하게, 정직하게, 내답게 살겠다.
당신들이 비겁하게 피하던 자리에서 이제 내가 당당히 선다.
사과 대신 침묵하던 입들 앞에서도, 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당신들의 방패라면, 내 진심은 내 검이다. 내가 더 이상 졸지 않는다.
이제 내는 안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니라, 잘못을 던지고 도망친 당신들이 비겁했다는 걸.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확실히 배웠다.
그러니 이젠 정말로 묻는다.
제 말, 이제 좀 이해가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