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의 봄
누군가 내게 말했다.
“인생이 꽃 같아서 좋으시겠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좋다는 말인데 왜 아팠을까. 그 말이 내 인생을 정말 다 본 걸까. 아니면 그저 겉모습만 본 걸까.
나는 웃으며 넘겼지만, 돌아서서 한참 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인생이 꽃 같다니, 대체 어떤 꽃 말인가. 활짝 피어 있는 꽃? 이미 시들어가는 꽃? 아니면 바람에 흩어지는 꽃잎 쪽일까.
거울을 봤다.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보였다.
그래도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조금 안도했다. 아직은 나도 피고 있는 중이구나.
나는 서른여덟이다.
어릴 땐 이 나이면 인생이 거의 완성된 줄 알았다. 결혼도, 직장도, 정답처럼 맞춰진 삶. 그런데 막상 서른여덟이 되어보니, 완성은커녕 아직 초안 단계다. 인생이라는 문장은 여전히 수정 중이다.
“지금도 창창한데, 젊은데.”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말이 왠지 낯설었다.
젊다니, 그럴까?
요즘 들어 몸이 쉽게 피로해지고, 작은 일에도 마음이 금세 닳아버리는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젊음이란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스무 살의 젊음은 불꽃이었다.
눈부시지만, 너무 빨리 타버렸다.
서른여덟의 젊음은 잔불 같다. 겉보기엔 작고 조용하지만, 안쪽은 여전히 뜨겁다. 오히려 이제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그 잔불의 시간 속에 있다.
세상은 나이를 숫자로 재단한다.
서른이면 안정돼야 한다 하고, 마흔이면 내려놓아야 한단다.
하지만 인생은 달력처럼 반듯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때로는 제멋대로 찢기고, 때로는 다시 붙여야 한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진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인생이 화려한 꽃밭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부러웠다.
왜 내 인생은 자꾸만 가시가 돋을까, 왜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부는 걸까.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알겠다.
가시가 있었기에 나는 더 단단해졌고, 바람이 있었기에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는 걸.
꽃이 아름다운 건 피어 있어서가 아니다.
바람에도 꺾이지 않으려 몸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모양새가, 이미 하나의 꽃이다.
서른여덟의 나는 조금 다르다.
이제는 완벽을 꿈꾸지 않는다.
조금 망가져도 괜찮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대신 내 마음이 시들지 않기를, 그것만 바라본다.
살다 보면 피는 일보다 지는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져야만 새로 피어난다.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짜 봄이 온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배웠다.
요즘은 길가의 꽃을 자주 본다.
누군가 일부러 심어둔 게 아닐 텐데, 아스팔트 틈 사이로 피어난 작은 들꽃들.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피어난 그 꽃들이 왠지 내 마음을 닮았다.
빛나진 않아도 꿋꿋하게, 누가 보든 말든 자신만의 계절을 사는 것.
그게 진짜 강함 아닐까.
서른여덟이면 아직 젊잖아.
그래, 젊다.
다만 그 젊음의 빛깔이 달라졌을 뿐이다.
예전엔 화려한 형광빛이었다면, 지금은 은은한 파스텔 톤이다.
눈부시진 않지만 따뜻하다.
그 온기는 나를 지탱해 준다.
스무 살의 나는 남을 부러워했다.
서른의 나는 남을 의식했다.
하지만 서른여덟의 나는 내 안을 본다.
비교는 멈췄고, 속도보다 방향을 더 생각한다.
꽃이 피는 시기도, 향기가 번지는 속도도 다르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인생이 꽃 같다는 말은, 어쩌면 그렇게 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누구처럼 이 아니라, 나답게.
누구의 계절이 아니라, 나만의 계절로.
피고 지는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도록.
나는 한때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도, 무언가를 이룰 시간이 남았을까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늦었다는 건, 여전히 길 위에 있다는 뜻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전히 피어날 수 있다는 신호다.
가끔 누군가 내게 묻는다.
“이제는 좀 내려놓을 때 아닌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며 말한다.
“저는 아직 피는 중이에요.”
꽃은 피어나야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피고 싶은 마음, 그 자체가 봄이다.
내 인생도 그런 봄 하나쯤 품고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는 누군가 “인생이 꽃 같아서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해도 웃으며 대답한다.
“맞아요.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쁘죠.”
삶은 그렇게 피고 지는 걸 반복하며 향기를 남긴다.
언젠가 그 향기가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할 수 있다면, 그걸로 내 인생은 충분히 피어난 거다.
서른여덟의 봄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깊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금씩 자라고 있다.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가지처럼, 비에 젖어도 향기를 잃지 않는 꽃처럼.
그게 지금의 나다.
인생이 꽃 같아서 좋으시겠냐는 그 말,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네, 좋아요.
바람도 맞고, 비도 맞지만
그래도 저는 매일 피어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