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장|걸음걸이

서두르지 않는 사람의 걸음

by Helia

추천 클래식

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Entropy in the Motion of Souls)”


요즘 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자꾸 보게 된다. 저들도 나처럼 팔자걸음이려나 싶어서다. 오래 걷다 보면 신발 뒤축이 유독 한쪽만 닳는다. 척추측만증 때문일까, 오다리 때문일까. 그러다 문득 생각이 멈춘다. 어쩌면 내 마음이 먼저 기울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한쪽으로 쏠린 마음이 내 몸을 따라 움직이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스치면 발끝이 조심스러워진다.

나는 예전부터 걷는 속도가 느렸다. 사람들은 나를 답답하다고 하지만, 난 아무리 급해도 서두르거나 뛰거나 하진 않는다. 그건 고집이라기보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방식이다. 숨이 가빠질 만큼 빨리 걷다 보면 생각이 도망친다. 생각이 사라진 걸음은 내 걸음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걷는다. 느리게 걷는 동안만큼은 내 마음이 몸과 나란히 움직인다.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마다의 리듬이 들린다. 구두 굽이 인도를 두드리는 소리, 운동화 밑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어깨가 스치며 흘리는 짧은 숨결까지. 도시는 발자국으로 만들어진 음악 같다. 어떤 사람은 바쁘게 뛰고, 어떤 사람은 무심히 걷는다. 모두가 각자의 속도로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약간 비켜 걷는다. 다른 이의 속도에 휘말리면 내 박자가 무너진다. 나는 내 걸음의 리듬으로 세상을 통과하고 싶다.

빠르게 걷는 사람들 틈에 서 있으면 세상이 나보다 한참 앞서 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뒤처지더라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생각하는 걸음을 원한다. 바람의 방향, 햇살의 기울기, 신발 밑의 진동까지 느끼며 걷는 것. 그 느림 속에 내 하루가 있다.

사람의 걸음에는 마음의 방향이 담겨 있다. 망설이는 사람의 발끝엔 불안이, 성큼성큼 걷는 사람의 발소리엔 확신이 묻어난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를 걷는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그러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오래 걷다 보면 종아리 쪽이 저려온다. 걸음을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어지는 순간이 나를 버겁게 한다. 세상은 내 맘처럼 흘러가지가 않아서 가뜩이나 속상한데, 내 몸마저 내 뜻처럼 따라주질 않으니 더욱이 서럽다. 마음은 앞으로 가고 싶은데 다리는 제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것 같다. 몸이 마음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때, 나는 문득 나이 들어간다는 걸 실감한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다. 저릿한 다리를 이끌고, 버거운 마음을 달래며, 그래도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렇게 하루를 견딘다.

비 오는 날이면 걸음의 모양이 달라진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사람들의 보폭이 조심스레 줄어든다. 발소리가 잦아들고, 도로 위의 리듬이 부드러워진다. 우산 아래의 걸음들은 제각각인데,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건 어쩌면 슬픔의 속도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런 날엔 천천히 걷는다. 물기 어린 도로 위에 내 발자국이 찍히고, 금세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잠시나마 존재를 남긴다. 사라짐 속에서도 존재는 증명된다. 걸음은 그 짧은 증명의 반복이다.

걷는다는 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이다. 복잡한 생각이 발끝으로 흘러내리고, 무거운 감정이 바닥에 떨어진다. 한 걸음이 한 생각을 비워낸다. 머리가 가벼워질수록 발이 가벼워지고, 발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이 단단해진다. 걷는 동안만큼은 어떤 후회도, 미련도 나를 붙잡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걷는다. 걸음이 내 안의 혼란을 정돈해 주니까.

누군가와 걷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고, 내가 천천히 걸으면 누군가는 앞서간다. 예전엔 그 차이가 불편했다. 한쪽이 빨라지면 다른 쪽이 맞춰야 하고, 속도를 달리하면 마음의 간격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함께 걷는다는 건 같은 속도로 걷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리듬을 인정하는 일이라는 걸.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따르며, 어떤 날엔 서로의 그림자가 포개인다. 그만큼이면 충분하다.

내 걸음은 유난히 한쪽으로 쏠려 있다. 왼발보다 오른발이 먼저 닳고, 신발의 바깥쪽이 더 빨리 해진다. 불균형이 눈에 보일 때마다 내 삶의 모양을 떠올린다. 너무 반듯하지도, 너무 고르지도 않은 길. 하지만 그 삐뚤어짐이 오히려 내 색깔이다. 완벽히 똑바로 걷는 사람은 없다. 세상도, 사람도, 마음도 언제나 약간의 기울기를 품고 산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걸음이 편해진다.

빠른 걸음보다 중요한 건 중심이다. 느려도 좋다. 모양이 엉성해도 괜찮다. 땅은 언제나 나를 받아준다. 넘어져도, 망설여도, 다시 일어설 자리를 내어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땅을 믿고, 내 두 발을 믿으며. 내 걸음은 완벽하지 않지만 진실하다.

언젠가 늙어 허리가 굽고 보폭이 좁아져도, 나는 여전히 걸을 것이다. 비틀거리더라도, 천천히라도, 그때의 나는 오늘보다 더 단단할 것이다. 발자국마다 지난 시간의 흔적이 묻을 테고, 그 위에 또 다른 내가 자라날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여전히 팔자걸음으로, 그러나 부끄럽지 않게. 내 걸음의 모양이 곧 내 인생의 문장이라면, 그 문장은 삐뚤더라도 내 손으로 끝까지 써 내려가고 싶다.

사람들의 걸음은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뛰듯이 지나가고, 어떤 이는 멈춰 선 채 한참을 머문다. 누군가는 고단한 하루를 견디며,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간다. 속도는 달라도,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걷는다.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디로 향하느냐다. 나는 나의 방향으로 걷는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의 시간 안에 있다.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고 사람들은 앞만 보며 나아가지만, 나는 오늘도 나만의 박자로 걷는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 멈추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