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장|사라지다

기억의 잔향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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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appearing in C♯ Phrygian, Op. 47 — Movement III: A Breath Before Silence


모든 것은 사라진다.
빛도, 목소리도, 사람의 온기도.
사라짐은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천천히, 아주 조용하게,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며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익숙했던 모든 것이 낯설어져 있다.

처음엔 작은 변화였다.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릴 때,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 않았다.
사진 속 얼굴이 어딘가 희미해지고, 함께 있던 공간의 냄새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은 그렇게 사라졌다. 불길처럼 타올라 한때 세상을 뒤덮었지만, 결국 재가 되어 흩어진다.
뜨거웠던 만큼, 남은 건 고요였다.

사라진다는 건, 끝나는 게 아니다.
그저 형태를 바꾸는 일이다.
사람이 떠나도 그 사람이 남긴 말, 시선, 습관이 내 안에 머문다.
그 사람을 닮아가던 내 표정, 말투, 웃음이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 사라짐은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남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잊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한 구절에 문득 가슴이 저려왔다.
그때 알았다. 사라진 줄 알았던 것은, 사실 잠들어 있던 것이었다는 걸.
사랑은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일상 속에 섞여, 묘하게 다른 모습으로 남는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건 희미해진다.
사랑의 언어는 잊히고, 목소리의 울림도 옅어진다.
하지만 그 자리를 완전히 비우진 못한다.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그때의 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은 사람이고, 남은 것은 시간 속의 나 자신이다.

사라짐을 견디는 일은,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은 것은 아프지 않다.
아픈 건 남아 있는 자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쓰고, 떠난 사람의 이름을 되뇌며, ‘잊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을 달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조차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인간은 잊어야 살아남는다. 기억은 생존의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잊음 속에서 살아간다.
어제의 일도, 어제의 감정도, 어제의 사람도 조금씩 사라진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써보지만, 어쩔 수 없다.
사라짐은 인간의 숙명이다.
사라지지 않으면 새로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라지는 건 슬픈 일일까, 혹은 자연스러운 일일까.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만큼 나 자신이 변화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던 사람을 잊고, 믿었던 것을 내려놓고, 꿈꾸던 미래가 흐려질 때
그 자리에 ‘지금의 나’가 태어난다.
사라진다는 건, 또 다른 나로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래도 때때로 마음이 아프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이 꿈에 나타나거나, 우연히 들은 노래가 지난 시절을 불러올 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시간은 흘렀지만, 마음은 그때에 머물러 있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사라짐은 그렇게 완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사라진다.
사진 속의 표정이 변하고, 손끝의 온도가 달라지고, 마음의 방향이 바뀐다.
하루가 지나면 어제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잊고 살뿐이다.
사라짐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도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사라진다는 건 지워지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이어지는 일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래된 메시지 속에서, 혹은 글 한 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은 없다.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 울었던 밤, 웃었던 계절들.
그 모든 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잠들어 있다.
언젠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때,
그 기억들은 새로운 얼굴로 깨어난다.
사라진다는 건 끝이 아니라, 다음의 시작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게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제는 조금 안다.
사라짐이야말로 존재의 또 다른 방식이라는 걸.
남지 않으려 애써도, 우리가 남긴 온기와 말, 시선은 어딘가에 머문다.
사라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늘도 나는 기록한다.
사라져 가는 마음을, 빛을, 사람의 그림자를.
이 글이 언젠가 지워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 느낀 감정만큼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길 바란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사라짐은 슬픔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