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의 지우개
사랑의 기억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사랑이란 건 때로 기억보다 먼저 무너진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사랑은, 기억이 무너져도 끝까지 남는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단순한 멜로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사랑이 인간에게 얼마나 가혹한 선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이 작품이 잊히지 않는 건, 그 안에 ‘기억이 사라져도 남는 감정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손예진이 연기한 수진은 한없이 맑고 사랑스럽다. 그녀의 웃음엔 세상의 모든 낙관이 담겨 있다. 정우성의 철수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무뚝뚝하고, 거칠고,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 둘이 만나 서로의 빈 부분을 채우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사랑이 사람을 바꾸는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완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기억이라는 불청객이 그들의 세계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처음엔 단순한 건망증 같던 증상이 점점 심해지며, 수진은 이름조차 잊고 집으로 가는 길도 잃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철수는 조금씩 지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의 기억 속에서는 그 사랑이 더 선명해진다. 그 반비례의 감정, 나는 그것이 너무 아팠다.
이 영화가 내게 준 가장 큰 충격은 ‘사랑의 지속’에 대한 잔혹한 질문이었다. 사랑은 기억이 있어야 가능한가? 아니면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의 흔적은 남는가?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보다, 나이가 들어 다시 봤을 때 훨씬 많이 울었다. 어린 시절엔 ‘기억을 잃은 여자의 비극’으로만 보였지만, 지금은 ‘사랑을 지키려는 한 남자의 고독한 싸움’으로 보였다.
철수가 혼자 벽돌을 쌓는 장면, 그 반복된 일상이 너무나 묘하게 내 마음을 건드렸다. 사랑을 붙잡는다는 건 결국 혼자 하는 노동 같다. 상대의 기억에서 지워지더라도, 내 안에서만큼은 그 사람을 지우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버팀. 철수가 그 벽돌을 쌓을 때 나는 내 안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언젠가 나 역시,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여전히 마음속에서 불렀던 적이 있다.
영화 속 수진이 철수를 잊어가며 남긴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이 나를 잊어도 괜찮아요. 내가 당신을 기억하니까.”
그 한 문장이 나를 무너뜨렸다. 사랑은 원래, 한쪽이 더 오래 기억하는 쪽의 몫이다. 그것이 때로는 지옥 같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감정의 밀도가 높은 영화다. 신파라 비난받기도 했지만, 나는 그 눈물의 결을 신파로 부르지 못하겠다. 그건 진짜 슬픔이다. 억지로 짜낸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통증이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며 가장 숨이 막혔던 장면은, 기억을 잃은 수진이 병원 복도에서 철수를 보고도 낯선 사람처럼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그 눈빛에는 “어딘가에서 본 것 같지만 확신할 수 없는 얼굴”이라는, 인간 기억의 잔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억이란 건 그렇게 잔인하다. 사랑의 모든 장면을 담고 있으면서도, 사라질 때는 경고 한마디 없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망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꼈다. 잊는다는 건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사랑했던 순간들이 먼지처럼 흩어지고, 결국 남는 건 ‘이 사람을 사랑했었다’는 감각뿐이다.
그럼에도 철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수진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담긴 절망과 인내, 그건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의 헌신을 넘어 인간의 존엄에 가까운 감정이다. 사랑이란, 상대를 붙잡는 게 아니라 지켜보는 일이라는 걸 그는 몸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수진이 잊어버린 기억 속에서도 철수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나는 울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은 남는다는 걸 믿게 되었다. 마치 우리의 뇌 속 어딘가에는 ‘사랑의 잔향’을 저장하는 비밀의 방이 있는 것처럼.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보고 나면 오래된 사랑이 떠오른다. 나는 예전의 나를 떠올렸다. 아직 순진하게 사랑을 믿던 시절, 누군가를 끝까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의 나. 그 다짐이 얼마나 무모하고도 아름다운지, 이제야 안다. 사람은 결국 모두 조금씩 잊으며 살아가지만,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그게 바로 이 영화가 말하는 진실이다.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을 다루면서도, 병리학적 고통보다 사랑의 ‘존재 증명’에 더 집중한다. 기억이 사라지는 대신 감정이 남고,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사랑이 남는다. 그 순환은 슬프면서도 묘하게 따뜻하다. 어쩌면 사랑은 기억보다 오래 사는 유일한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지워진다는 건 곧 다시 써야 한다는 뜻’이라고 느낀다. 수진의 머릿속에서 철수가 지워졌다면, 철수의 마음속에서 수진은 더 깊이 새겨졌다. 그 불균형 속에서 사랑은 완성된다. 영화가 끝나도, 그들의 사랑은 내 머릿속에 남았다. 지워지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 있다.
세월이 흐르고, 나 역시 몇 번의 이별을 겪으며 깨달았다. 사랑은 기억 속에 사는 게 아니라, ‘잊지 않으려는 마음’ 속에 산다는 걸.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결국 그런 이야기다. 사람은 사라지고, 이름도 희미해지고, 목소리조차 가물가물해져도, 그 마음의 온기만큼은 끝내 남는다.
나는 가끔 이 영화를 떠올릴 때, 내 안에도 지우개가 하나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지우개는 나를 지키기도 하고, 상처를 덮기도 하며, 때로는 사랑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사랑은 결국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내 삶을 다시 쓴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는 그런 영화다. 잊혀가는 세계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영화 속 사랑의 서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한 은유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잃고, 다시 기억하려 애쓰는 일. 그 모든 과정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나는 이 영화를 ‘슬픈 영화’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의 잔향을 들려주는 영화’라 부르고 싶다. 보고 나면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식는다. 마치 오래된 사랑의 편지를 우연히 다시 발견한 듯한 감정.
그래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잊지 않게 해 준 이 영화에 고맙다.
지워진다 해도, 사랑은 여전히 남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영화.
그것이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내 인생의 기억 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