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미움으로, 미움은 다시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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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n Silvestrov – The Messenger
눈이 내리면, 나는 네 얼굴부터 떠올린다.
하얀 세상이 조용히 숨을 고를 때, 내 안의 기억도 천천히 깨어난다.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 그러나 덮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아래에는 여전히 따뜻했던 손길, 차가웠던 말,
다신 꺼내고 싶지 않은 이름 하나가 남아 있다.
눈은 그 위에 흰빛의 침묵을 덧칠할 뿐이다.
그 침묵 속을 나는 오래 걸었다.
발자국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마치 내 안의 잔향처럼 길게 이어졌다.
겨울의 거리는 사람의 온기를 쉽게 삼키고,
마음의 불씨를 천천히 식힌다.
그 속에서, 나는 늘 너를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했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늘 기울어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하늘을 본 적은 많았지만,
같은 온도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너는 눈처럼 내렸고, 나는 그 눈을 맞았다.
처음엔 따뜻하다가, 이내 시렸다.
그리고 그 시림이 내 안에서 사랑이 되었다가,
사랑은 곧 미움이 되었다.
미움은 다시 애증으로 변했고,
애증은 또다시 사랑으로 되돌아왔다.
그건 애잔한 애증이었다.
사랑하기엔 너무 다치고,
미워하기엔 너무 남아 있었다.
그 애증은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눈처럼 서서히 얼어붙었다.
그날, 첫눈이 내리던 오후였다.
함께 걷던 골목, 녹아내리던 눈송이,
그 위에 번지던 우리의 웃음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지금 그 장면을 떠올리면,
그 웃음 속에 숨어 있던 차가운 기류가 느껴진다.
그때 나는 몰랐다.
우리가 웃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의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는 걸.
눈발이 흩날리는 카페 창가에서
나는 네가 마시던 커피를 떠올렸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언제나 부드럽게 시작해서
끝내는 어딘가로 틀어졌다.
너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내 한마디에 네가 식어가던 그 시간들.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가장한 싸움이었다.
그건 애잔한 애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애잔한 애증이다.
시간이 흘러도 감정은 단순히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으면 흙이 드러나듯,
사랑이 식으면 그 밑바닥에는 미움이 남는다.
그리고 그 미움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어느 해 겨울,
다시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거리의 불빛이 눈발에 부서지고,
바람이 낯익은 냄새를 남겼다.
그때 문득, 네 이름이 떠올랐다.
아무 예고도 없이.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건 그리움도, 미움도 아닌 웃음이었다.
그저 오래된 감정 하나가 녹아내리는 소리 같았다.
이해했다.
우리가 서로를 미워했던 이유는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도 깊어진다.
그 아픔이 애증이 되어 내 마음속 눈밭으로 파묻혔다.
나는 그것을 꺼내 녹일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하얀 채로, 잊힌 듯이.
그날 이후로 나는 눈을 보면 잠시 멈춰 선다.
사람들은 첫눈을 설레며 맞지만,
나는 눈 속에 파묻힌 기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함께 걷던 거리, 차가운 공기, 그리고 짧은 숨결.
그 장면들은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잠시 따뜻해진다.
그 따뜻함은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애증이란 감정은 결국 나를 향한 화살이었다.
나는 너를 미워하며 나를 미워했고,
너를 그리워하며 나를 용서했다.
그 복잡한 감정의 눈밭 속에서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눈 위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나를 살렸다.
그 온도 덕분에 나는 마침내
너를 마음속에서 놓아줄 수 있었다.
그건 잊음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우리의 계절은 이미 끝났다는 것.
하지만 그 끝이 실패는 아니라는 것.
어떤 사랑은 미움으로,
어떤 미움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 순환이 인간의 마음을 조금씩 자라게 만든다는 걸.
눈은 그렇게 모든 것을 품는다.
그 안에는 애잔함과 애증이,
따뜻함과 냉기가,
그리움과 이별이 뒤섞여 있다.
나는 그 복잡한 감정의 눈밭 속에서
비로소 나 자신을 마주했다.
사랑은 종종 상처의 모양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상처가 꼭 슬픔은 아니다.
그건 지나간 계절의 증거이고,
한때 뜨거웠던 마음의 흔적이다.
눈처럼 흩어져 녹아내린 모든 순간들이
결국은 나를 살아 있게 했다.
눈이 다시 내린다.
나는 잠시 눈을 감는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리고,
하얀 세상이 고요히 덮인다.
그 속에서 나는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 그땐 그랬지.
눈 속에 파묻힌 그 애증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구나.”
눈은 다시 내리고,
나는 여전히 그날을 안고 산다.
그 애증이 나를 만든 한 조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