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세상이 조용히 숨을 멈췄다
그날 밤, 창밖의 초침이 멈춘 줄 알았다.
방 안엔 형광등 불빛 하나 없고, 커튼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바닥 위에 고요히 퍼져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인 듯, 공기조차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 정적 속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아무 소리도 없는데, 무언가가 들렸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나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멈춘다는 건 어쩌면 착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착각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순간 아닐까. 나는 초침이 멎은 듯한 밤에만 비로소 나의 박동을 들었다. 세상이 흐르지 않을 때, 내 안의 시계만이 고요히 뛰고 있었다.
창문 너머 가로등 불빛이 벽에 길게 드리워지고, 그림자가 천천히 숨 쉬는 듯 흔들렸다. 그 느린 진동이 나를 감쌌다.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직 나의 세계가 정지했다. 어제도, 내일도, 모두 그 밖의 일처럼 느껴졌다. 오직 ‘지금’만이 존재하는 밤. 시간의 강물에서 떨어져 나온 고요한 물방울처럼, 나는 그 한 점의 고요 안에 머물렀다.
멈춘 시간 속에서, 나는 오래 전의 나를 만났다.
그때의 얼굴은 지금보다 훨씬 순하고 어렸다.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망보다,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던 시절의 나였다. 그 아이는 내게 물었다.
“지금, 행복해?”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빛은 여전했고, 세상은 여전히 조용했다. 행복의 모양이란 언제나 늦게 오는 법이다. 그건 지나간 후에야 깨닫는 어떤 감정의 잔향이다.
나는 문득, 떠나간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닿을 수 없는 얼굴들,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밤의 틈새에서 떠올랐다. 그들의 목소리가 멈춘 공기를 흔들었다. “괜찮아, 그렇게라도 살아남은 거야.” 누군가의 낮은 속삭임이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에 눈을 감았다.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미뤄둔 안도의 감정이었다.
시간은 늘 흐른다고 믿었지만, 이 밤은 예외였다.
흐름이 멈춘 자리에선 오히려 모든 것이 선명했다.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되살아났고, 꺼냈던 후회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필름을 되감아 보듯, 나는 나의 시간을 조용히 되짚었다. 모든 실패가 하나의 문장이 되었고, 모든 상처가 한 편의 문장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나는 내 안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시간이 멈춘 밤은, 내 안의 시계를 새로 맞추는 시간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느라 내 시간을 잃어버린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그렇게 달려오며 나는 ‘지금’을 놓쳤다. 그런데 멈춘 밤, 그 모든 것이 무색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음’을 견디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달빛은 바닥 위에서 서서히 옅어졌다.
새벽이 가까워지는 신호였다.
그러나 나는 그 빛이 사라지기 전에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벽시계의 초침은 다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내 안의 시간은 아직 고요했다. 세상이 돌아가도 내 중심은 그대로였다. 그 조용한 균형감이 이상할 만큼 위로가 되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사랑과 미움이 구분되지 않고, 얻음과 잃음이 한 줄로 이어진다. 인간이 쥐고 있는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하나의 숨결로 녹아든다. 그리고 그 숨결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영원이라는 말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밤이 끝나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은 예의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커튼 사이로 새어든 회색빛이 내 눈꺼풀을 두드렸다. 세상은 다시 시작될 참이었다. 잠시 멈춰 있던 시계들이 일제히 박동을 되찾았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새가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여전히 멈춘 밤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그 잔향은 낮의 소음 속에서도 조용히 숨 쉬었다.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거나, 끝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속도에 휩쓸릴 때면, 나는 그 밤을 떠올렸다. 그때의 정적, 그때의 달빛, 그때의 나.
멈춘 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내 안의 영원으로 남아 있었다.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인간은 흐름의 틈 사이에 멈춘다.
그 멈춤은 잠시의 쉼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세상의 모든 시계가 나를 놓칠 때,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붙잡는다. 시간의 강을 잠시 벗어나, 그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나는 내 안의 고요에 귀를 기울인다. 그곳에서 나는 매번 처음의 나를 만난다.
무언가를 잃고도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도 내일을 꿈꾸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밤은 나에게 그런 진실을 보여주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
불안도 후회도, 그 모든 감정이 결국 생의 증거라는 것을.
우리는 흐름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멈추고, 멈춤 속에서 다시 흘러가기 위해 숨을 고른다.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세상의 박동을 들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시간이 멈춘 밤은 결코 죽은 순간이 아니라,
삶이 가장 또렷하게 살아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 밤은 내게서 흘러간 모든 날을 되돌려 주었고,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주었다.
시간이 멈춘 밤,
나는 비로소 나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 고요한 기억 하나면,
다시 내일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어떤가.
세상의 소음이 모두 잠든 그 시간,
당신의 시계는 어디쯤 멈춰 있나.
혹시 지금도, 내 안의 초침처럼 조용히 뛰고 있진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