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

사랑이 지나간 방에는 공기만 남는다

by Helia

그 애를 떠올릴 때마다, 내 안이 비어 가는 기분이 든다. 이름조차 부르지 않아도, 그 애는 여전히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다. 사라졌는데도 남아 있고, 멀어졌는데도 손끝에 닿을 듯하다. 사람 하나가 남긴 여백이 이렇게 크고 오래갈 줄은 몰랐다. 마음이라는 건 원래 채우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함께한 기억보다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더 길었다. 만나지 않아도 마음 한편엔 늘 그 애가 있었다. 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 한 소절, 가로등 아래 깔린 그림자,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도 그 애가 스며 있었다. 보이지 않는데도, 그 애의 흔적은 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묻어났다. 아마 내가 여전히 그 애를 불러내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공허하다는 건 단순히 쓸쓸하다는 뜻이 아니다. 무언가를 잃은 뒤 남은 ‘빈 형태’의 감정이다. 사람의 온기가 스쳐간 자리, 다정했던 말이 식어버린 자리가 그대로 남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 ‘아무 일도 없음’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 사랑이 끝난 뒤의 하루란, 벽시계 초침 소리마저 커지는 시간이다.

그 애와 나는 끝내 같은 시간을 살지 못했다. 스쳐갔을 뿐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꼭 한 걸음쯤 비껴 났다. 우리는 결국 서로의 그림자였다. 다가설수록 희미해지고, 붙잡을수록 사라지는. 그 애를 마음속에서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놓는 척만 했을 뿐이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무심하게 닫히지 않는다. 닫히는 건 기억이 아니라, 목소리다.

어느 날, 오래된 대화창을 열었다. 스크롤을 내리면 그 애가 남긴 짧은 메시지 하나. 잘 지내요. 다섯 글자. 그 짧은 문장 안에 수많은 계절이 스며 있었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눈빛, 그때의 떨림이 되살아났다. 나는 그 문장을 끝내 지우지 못했다. 삭제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우면, 정말 사라질 것 같아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공허는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조용하고 깊게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공허를 견뎌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걸 ‘동거’에 가깝다고 느낀다. 마음 안의 빈방 하나에 공허가 살고 있다. 가끔 문틈으로 바람이 스며들고, 그 바람이 내 생각을 뒤흔든다. 나는 그 빈방을 닫지 않는다. 닫으면, 내 안의 사랑까지 사라질 것 같아서.

사람을 잃는 일은, 그 사람이 남긴 온도를 잃는 일이다. 그 애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보다, 그 애의 온기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더 아프다. 기억은 살아 있는 감정이니까. 잊지 못한다는 건 불행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증거다.

어느 저녁,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바라보다 문득, 그 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끝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이내 사라지는 모습. 나는 그 사라짐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공기는 손 안에서 새어 나갔다. 결국 남은 건 한 모금의 온기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공허를 마셨다.

공허는 괴롭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감정이니까. 비어 있는 방에 앉아 있으면, 그 애의 웃음이 벽을 타고 돌아온다. 착각인 줄 알지만, 그 착각 덕분에 하루를 견딘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착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사람들은 ‘잊어야 한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잊는다는 건, 그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내 안의 한 조각을 지우는 일이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공허가 나를 괴롭히는 순간에도, 그것이 나를 증명한다고 느꼈다.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마음을 내어주고,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가끔은 문득 그 애가 궁금하다. 어디서, 어떤 계절을 살고 있을까. 여전히 웃고 있을까. 하지만 묻지 않는다. 묻는 순간, 지금의 이 공허가 무너질까 봐 두렵다. 공허는 역설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연결’이기도 하니까. 그 애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이 감정으로 그 애를 불러낸다. 존재하지 않지만, 완전히 사라진 적 없는 사람처럼.

공허는 내게 이렇게 가르쳤다.
사랑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사람이 떠나도 감정은 남는다고.
그 감정이 때로는 슬픔으로, 때로는 빛으로 내 안을 비춘다고.

이해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공허를 이겨내기보다, 그 안에 잠들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그 애의 이름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때쯤엔 공허가 공기처럼 가벼워져서,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비어 있는 존재다. 그 안을 누가 채워주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이 달라진다. 나는 그 애로 채워진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애가 떠난 자리의 ‘빈 형체’로 살아간다. 그 둘 다 나의 일부다.

어쩌면 사랑이란, 끝내 사라지지 않는 공허를 품고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애가 내게 남겨준 건, 어떤 문장보다도, 어떤 선물보다도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이 내 하루를 버티게 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생각이 길어지고, 문득 그 애의 이름이 공기 속에서 흩날린다. 입술 끝에서 맴돌다 삼켜버린다. 부르면 다시 아플 것 같아서. 그래도 마음은 안다. 내가 여전히 그 애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사랑이 이제는 그 애가 아니라, 그 애가 남기고 간 ‘공허’라는 걸.

사라진 건 그 애였지만, 비어 있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 애가 떠난 자리엔 바람만 남았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오늘도 살아 있다.
공허는 슬픔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내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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