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가진 봄
하린의 마음 안에서, 그리고 아주 멀리 또 다른 곳에서도, 이름 없는 봄빛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두 아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 반대편의 작은 도시. 오래된 가구 공장의 뒤편, 좁은 골목 끝의 회색 집 한 채.
한 소년이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햇빛은 커튼을 뚫고 들어와 책상 위에 희미하게 닿았지만, 그 빛은 아이의 얼굴까지 닿지 못했다.
소년은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종이 조각들과 오래된 엽서, 그리고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어린 자신과 여자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고아원 건물 측면을 배경으로, 두 아이 모두 표정 하나 없는 얼굴.
마치 웃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이별을 먼저 배운 사람들처럼.
소년은 사진의 모서리를 엄지로 쓸었다.
“하린…”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너무 작아서, 마치 숨처럼 흩어졌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밥은 잘 먹을까.
아직 밤마다 혼자 울까.
혹시 자신처럼—여전히 꿈속에서도 이별을 연습하고 있을까.
소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으려다, 손끝이 멈췄다.
햇빛 한 줄기가 사진 위로 비쳤다.
그 순간, 사진 속 여자아이의 눈동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다.’
소년은 문득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낯선 언어의 거리.
그 속에 아주 잠깐, 분명히 들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처럼.
하지만 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
한국의 봄. 금희의 집.
하린은 여전히 잠들지 못한 얼굴로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다.
사진을 가슴에 품은 채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꿈속에서도 오빠의 웃음이 흩어졌다.
금희는 조용히 다가와 베개를 고쳐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그 말에 하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금희 쪽으로 조금 몸을 돌렸다.
익숙하지 않은 온기였지만, 더 이상 낯설지는 않았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자, 두 오빠의 분주한 발소리가 들렸다.
큰오빠는 신발 끈을 묶으며 무심한 척했고, 작은오빠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하린이 오늘도 나올까?”
금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천천히 하겠지.”
큰오빠가 말을 끊었다.
“그건 네가 이상한 말 해서 놀라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작은오빠는 얼굴이 벌게졌다.
“아니야! 진짜 웃었어! 귀엽게!”
금희는 두 아이를 말리려다 웃음이 터졌다.
“둘 다 늦겠다. 얼른 가.”
오빠들이 현관으로 향하며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는 그 순간——
거실 뒤편에서 아주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사락—
세 사람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하린이 문틈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덜 긴장한 얼굴이었다.
눈동자 속의 두려움 대신, 아주 작은 빛이 깃들어 있었다.
작은오빠가 놀란 듯 외쳤다.
“하… 린아?”
하린은 대답 대신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진을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두 오빠 앞에서 멈췄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공기마저 숨을 참는 듯 고요했다.
하린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작은 손끝이 공기 위로 올라와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입술이 열렸다.
“잘 다녀와.”
그 목소리는 작았지만, 확실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원해서 꺼낸 말.
낯설고 어눌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작은오빠는 그대로 굳었다.
그러다 눈이 반짝이며 말했다.
“어… 어! 다녀올게! 하린아, 우리 빨리 올게!”
큰오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응. 다녀올게.”
문이 닫히고,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하린의 손끝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사람의 온기, 그리고 이름이 있는 세상의 따뜻함.
금희는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가갔다.
하린의 얼굴에는 미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 미소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분명 봄빛이었다.
금희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하린아… 밥 먹자.”
그 말에는 단 한 톨의 강요도 없었다.
그저 기다림과 초대, 그리고 ‘너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린은 잠시 금희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따뜻했고,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손이었다.
처음으로—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린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사진을 꼭 쥔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진짜 ‘목소리’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 엄마.”
그 단어가 공기 중에 닿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금희는 숨이 멎은 사람처럼 하린을 바라보았다.
눈이 커졌다가, 이내 눈물로 번졌다.
하린이 다시 한번, 조금 더 또렷하게 말했다.
“엄마…”
이번에는 단어 끝이 미세하게 울렸다.
금희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허리를 굽혀 하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응… 엄마야.”
그 말은 방 안을 부드럽게 울렸다.
하린의 눈이 그제야 부드럽게 굽어졌다.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금희는 그 아이를 안았다.
아무 말 없이, 오래, 깊게.
이제야 완전히 봄이 왔다.
그날 밤,
하린은 잠이 들며 중얼거렸다.
‘엄마’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속으로.
그 소리가 공기 속을 맴돌며 방을 따뜻하게 채웠다.
그리고 아주 멀리, 또 다른 나라의 작은 방에서도——
소년이 갑자기 눈을 떴다.
가슴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무언가 불러주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하린…”
소년은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오랜만에 입술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창문 밖에서 봄바람이 불었다.
멀리 떨어진 두 세계의 공기가 동시에 흔들렸다.
누구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마치 오랫동안 끊겨 있던 실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