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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시간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자리

by Helia

누군가 정말로 그녀를 향해 오고 있다.
시간을 가르고, 기억을 흔들면서.

그 확신 같은 불안이 해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점화되었다.
창가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해윤은 떨리는 발끝을 억지로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5초 정도 걷고 나서,
그녀는 깨달았다.

세계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직원들이 지나가며 나누는 잡담 소리,
멀리서 울리는 프린터음,
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
전부 한 박자씩 늦게 따라왔다.
마치 소리가 ‘현재’를 조금 놓치고
그 뒤를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해윤 씨, 3시 스튜디오 체크 가야 돼요.”
지수가 말하자,
해윤은 평소처럼 “네”라고 대답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조차 약간 어긋나게 들렸다.

지하층 촬영 스튜디오는
평소보다 더 어두웠다.
스피커 점검 음이 은은하게 울리고,
엔지니어들은 케이블을 정리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순간,
해윤은 숨을 멈추었다.

공기.
밀도.
파동.

모든 게,
지금 이 공간만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얇게 겹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해윤 씨, 오늘은 음성 가이드만 체킹 하면 돼요.”
팀장이 말했다.

노트북을 켜고 파일을 불러오려는 순간,
가방 속 AI 스피커가 스스로 깜빡였다.

지직— 지지직—

조그마한 LED가 정상적으로 켜지지 않고
마치 수면 위로 올라오려다 가라앉는 빛처럼 튀었다.

“감정… 파동… 연동… 불… 안정—”

AI의 기계음은 중간에 끊겨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말을 막은 것 같은 느낌을 줬다.

해윤의 손등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빨라졌다.

모델이 마이크 앞에 섰고,
엔지니어가 테스트 음을 재생했다.

“테스트. 하나, 둘—”

그 순간이었다.

스튜디오 스피커에서
낮고 깊은 숨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목소리.
마치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듯한 온도.

——“… 해윤.”

엔지니어가 고개를 들었다.
“어? 지금 누구 말했어요? 방금… 남자 목소리 같았는데?”

지수도 놀란 듯 주변을 둘러봤다.
“누구 있어요? 문 좀 확인해 봐.”

하지만 해윤은 그들과 다른 차원의 충격을 받았다.

그 목소리는, 꿈속에서 자신을 안아주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헌의 목소리.

숨이 한순간 턱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피커가 또 흔들렸다.

——“기억… 하지 마…”
——“아직… 준비… 안 돼…”
——“… 해윤—”

끊기고, 이어지고, 왜곡되고.
하지만 분명히 ‘그’였다.

해윤은 뒤로 물러나 벽에 손을 짚었다.

그때,
패널들이 고요한 공기 속에서
스스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흔들림.
오직 해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시간 간섭’ 특유의 떨림.

머리가 아지랑이처럼 뜨거워지며
기억 파편이 길게 열렸다.


---

기억의 장면

젖은 거리.
노란 불빛 아래에서
어떤 남자가 해윤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눈동자가 떨렸고
입술이 젖어 있었다.

“해윤아…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야.”

해윤이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더 절실하게 그녀를 끌어안듯 손을 감쌌다.

“네가 잊어도…
나는 다시 찾을 거야.”

그리고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해윤.”

지금 들리는 목소리와 완전히 같았다.


---

파편이 끝나는 순간,
해윤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지수가 급히 팔을 붙잡았다.
“해윤 씨! 눈 좀 떠봐요, 괜찮아요?”

같은 순간—
녹음실 유리창 반사 너머
복도 가장자리에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5화보다 더 가까웠다.
바로 복도,
바로 스튜디오 문 앞.

빛 때문에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선, 체구, 기류—
모두 똑같았다.

그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해윤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리고
공기에서 울림이 흘러왔다.

“… 해윤.”

이번엔 확실히,
스튜디오 안에서 울렸다.

이어진 한 문장.

“준비해.
곧… 열릴 거야.”

음성이 끊기고
실루엣도 사라졌다.

하지만 해윤의 마음속에서는
문이 이미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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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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