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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파도

파도 끝에 남은 빛 하나

by Helia

인생은 늘 바다를 닮아 있다. 잔잔한 날에도 깊은 곳에서 물결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겉으로 아무 일 없는 듯 보이던 삶 역시 그 속에서는 끊임없이 요동친다. 우리는 그 흔들림 한가운데를 헤엄치며 하루를 견디고, 내일을 향해 다시 팔을 젓는다. 누군가의 눈에는 바람 한 점 없는 평온한 해면처럼 보여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는 저마다의 물살이 밀려오고 밀려나며 파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살아온 시간만큼, 지나온 계절만큼, 우리 모두의 바다는 각자의 음색을 가지고 출렁인다.

어릴 적에는 파도가 그저 여름 해변의 기분 좋은 풍경이었다. 물결이 모래를 데리고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토해내던 그 반복이 신기했고, 발끝에 닿는 시원함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하지만 세월을 조금 더 건너와보니 파도는 단지 자연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생을 설명하는 거대한 은유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기쁜 순간도, 슬픈 순간도, 실패도, 성공도 모두 물결처럼 흘렀다. 무엇 하나 영원히 머무르지 않았고, 무엇도 처음의 모양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했다. 때로는 내가 준비도 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거친 파도에 떠밀려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파도는 나를 완전히 삼키지는 않았다. 흔들렸지만 가라앉지 않았고, 잠시 멈췄지만 다시 떠올랐다.

살아오며 배운 건, 인생은 ‘파도를 이기는 법’이 아니라 ‘파도 속에서 숨 쉬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잘 버티는 사람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도, 다 같은 바다 위에 있다. 누구 하나 잔잔한 물결만 건너왔을 리 없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자기만의 물살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다. 어떤 이는 폭풍을 견뎌냈고, 어떤 이는 이기지 못한 채 떠밀려왔고, 또 어떤 이는 끝내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파도의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버텨낸 마음만큼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속단하거나 쉽게 판단하는 건 결국 얕음에서 비롯된 오만일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품은 물결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타인의 상처 앞에서 쉽게 말할 수 없어진다.

파도는 우리가 원할 때만 밀려오지 않는다. 좋은 일이 넘칠 때도, 상실이 몰아칠 때도, 갑자기 찾아온 슬픔에 몸을 숨기고 싶을 때도, 파도는 무심하게 수면을 어지럽힌다. 그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인생에서 안전지대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쉼표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쉬다 보면 다시 나아가야 하고, 겁이 나도 한 걸음 다시 내디뎌야 한다. 파도와 마주치는 일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앞에서 몸을 낮추고 중심을 잡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다.

나는 종종 내 삶의 물결을 떠올린다. 예상치 못한 이별이 있었고, 벼랑 끝 같은 좌절이 있었으며, 가슴을 뜨겁게 했던 찰나의 기적들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반복해서 밀려왔다 사라졌고,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고요한 날들보다 바로 그 거센 날들이 나를 더 깊게 변화시켰다. 파도는 나를 흔들었지만 동시에 나를 형성했다. 깎여나간 자리엔 단단함이 생겼고, 닳아버린 가장자리에는 새로운 결이 스며들었다. 상처가 난 자리마다 포기 대신 성장이 자리를 잡았고, 실패가 지나가고 난 뒤에는 또 다른 선택지가 펼쳐졌다. 파도는 잔인하지만, 그 잔인함 속에 알려주는 것이 있다. 흔들리더라도 부서지지 않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파도는 끊임없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잔잔한 바람처럼 스쳐가고, 어떤 사람은 삶을 통째로 흔드는 폭풍처럼 다가온다. 붙잡고 싶었지만 떠나버린 사람도 있었고, 붙잡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아준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인연은 물결처럼 오고 간다. 해변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때도 있고, 강한 파도처럼 나를 새 방향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그 만남과 이별이 모두 필요했던 흐름처럼 보인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곳으로 도달하게 된 이유가 어느 파도 때문이었는지,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날들이 있다.

가끔은 정말 지친다. 아무리 헤엄쳐도 제자리 같고, 아무리 버텨도 계속해서 덮쳐오는 파도 앞에 무력감을 느키는 날도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싶어서. 하지만 바다는 원래 흐르는 곳이고, 파도는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나 역시 멈추지 않는 존재라는 걸 이내 깨닫는다. 잠시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건 쉼이지 포기가 아니다. 다시 떠오르는 순간, 오래 눌려 있던 마음들이 가벼워지고 상처가 숨 쉴 틈을 찾는다. 파도는 때로는 우리에게 내려가는 시간을 허락해 준다. 올라가기 위해 내려가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파도는 보통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온다. 내가 단단해졌다고 믿고 있던 때, 마음을 다잡은 순간, 혹은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느낀 바로 그 지점.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결국 우리는 살아남는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칠고,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 무너지는 것 같다가도 금세 새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작은 조약돌 같은 희망이 남는다. 우리가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희망은 늘 어딘가에 널려 있다. 물결이 사라진 뒤 모래 위에 남아 반짝이는 조개처럼.

나는 앞으로도 여러 파도를 맞게 될 것이다. 아마 어떤 날엔 두려울 거고, 어떤 날엔 숨이 찰 정도로 버거울 것이다. 때로는 휩쓸려가고, 때로는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인생이 아닐까. 넘어질 때가 있어야 일어서는 의미가 생기고, 흔들릴 때가 있어야 내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확인된다. 파도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같은 자리에 머물렀을 것이다. 변화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한 채로. 오히려 밀려오는 물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파도는 나를 흔들어놓지만, 동시에 내 나침반을 다시 정렬해 준다.

인생의 파도는 때로 잔인하고, 때로 따뜻하며, 때로 우리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밀어 올린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파도는 늘 지나간다. 거센 물살도, 절망 같은 순간도, 감당하기 힘든 슬픔도 결국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배운다. 세상은 절대 멈추지 않고, 나 역시 멈추지 않는 존재라는 걸. 떠밀리기도 하고, 잠시 가라앉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떠오르는 생명이라는 걸.

오늘의 나는 어제의 파도를 건넌 사람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물결을 통해 조금 더 단단해질 사람이다. 파도는 나를 시험하려고 오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신호처럼 찾아오는 것이다. 흔들리는 것조차 삶의 일부이며,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결국 더 깊어지고 더 확실해진다. 그러니 지금 내 앞에 어떤 물결이 일고 있든, 나는 알고 있다. 이 파도 역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또 다른 빛이 깔릴 것이다. 나는 그 빛을 향해,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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