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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마음이 먼저 떠나는 곳

by Helia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기울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 이 자리와는 전혀 다른 어떤 풍경, 어떤 공기, 어떤 바람이 문득 가슴을 두드린다. 그 두드림은 소란스럽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또렷하다. “여기 말고 어딘가.” 그렇게 간단한 문장이 이렇게나 마음을 흔들 때가 있다. 기차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갈 곳이 많다는 건 참 다행이구나’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날이면, 나는 이미 반쯤 여행을 떠난 사람이다. 여행은 발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일 때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마음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내가 가장 쉬고 싶은 장소다.

내가 떠올리는 여행지는 늘 몇 곳으로 모인다. 전남 담양, 전주 한옥마을, 순천만정원, 여수, 그리고 제주도. 누군가는 지루한 이름이라 말할지 몰라도, 내게 이 다섯 곳은 삶의 속도를 바꿔주는 스위치 같은 곳이다. 흔들릴 때면 저절로 떠오르는 이름, 지칠 때면 가장 먼저 품에 안아주는 풍경, 그리고 나를 다시 붙잡아주는 공기들. 여행지는 대단한 이유 없이도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가만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곳, 그게 진짜 여행지다.

담양은 언제 생각해도 마음 깊숙한 곳의 무거운 먼지를 털어내는 느낌을 준다. 초록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대숲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세상의 소음을 씻겨 보내는 듯하다. 담양의 바람은 도시의 바람과 결이 다르다. 도시의 바람이 무채색이라면, 담양의 바람은 확실히 초록빛을 띤다. 마치 나무가 직접 숨을 내쉬는 것처럼 서늘하고 맑다. 그래서 담양에 도착하면 늘 한참을 가만히 서 있게 된다.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오는 바람의 숨결, 잎사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동들. 이것들은 모두 내 마음속 어수선한 것들을 조용히 정리해 준다. 풍경은 그대로인데 마음이 먼저 정리되는 경험. 그러니 나는 종종 담양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내가 다시 숨을 고르고 싶을 때, 초록은 늘 나를 구한다.”

전주 한옥마을은 속도를 늦추고 싶은 날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전주에선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른다. 골목 따라 이어지는 기와지붕 사이로 햇빛이 떨어지면, 시간도 그늘 아래 잠시 쉬어가는 듯하다. 한약방 앞을 지날 때 은근하게 풍기는 향, 나무 기둥에서 스며 나오는 오래된 온기, 한복을 입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까지. 모두가 ‘조금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전주에 가면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진다. 세상이 나를 재촉하지 않는 곳에서는, 나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전주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속도가 빨라 재미있는 곳이 아니라, 속도가 느려서 마음이 쉬어가는 곳. 전주의 골목을 걷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여행은 어디 멀리 가는 게 아니라, 잊어버린 나의 속도를 다시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순천만정원은 마음을 적셔주는 여행지다. 담양의 바람이 비워내는 바람이라면, 순천의 바람은 무언가를 피워 올리는 바람이다. 정원 곳곳을 천천히 걸으면 꽃향기와 흙냄새가 공기 속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해 질 무렵 순천만에 서 있으면,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빛이 펼쳐진다. 붉은빛과 금빛이 물 위를 천천히 떠다니고, 갈대들은 바람을 따라 거대한 물결처럼 흔들린다. 풍경은 움직이지 않는데, 내 마음만 부드럽게 흔들린다. 이런 순간에는 내가 왜 그동안 버티고 있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순천에서는 늘 마음이 젖는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도 안 되는 무언가가 흔들려 밖으로 흘러나온다. 그래서 나는 순천만을 떠올릴 때면 늘 이렇게 말한다. “바람이 마음까지 흔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 준 곳.”

여수는 바다를 품고 있는 도시다. 여수에 가면 먼저 바람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염도 높은 공기가 뺨을 스칠 때면,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몸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 여수의 밤바다는 노래보다 훨씬 더 조용하고 깊다. 물결 위로 비친 불빛들이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반짝이는데,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함께 흔들린다. 바다라는 건 늘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끝을 모른다는 건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희망적이다. ‘더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수를 생각하면 나는 늘 이렇게 속삭인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 바다의 끝처럼, 내 삶도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여행지, 제주도. 제주도는 여행지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제주도는 차라리 풍경의 감정이자 마음의 호흡 같다. 바람은 거칠지만 마시고 나면 시원하고, 들판은 넓지만 부드럽고, 바다는 깊지만 빛난다. 제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보고 있으면 마음도 따라 흔들리고, 현무암 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오래 묵힌 감정들이 천천히 녹아내린다. 제주도에서는 새로운 아침을 맞는 것만으로도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제주를 떠올리며 자주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나를 필요로 하는 날에는, 제주가 먼저 떠오른다.”

이렇게 여행지를 떠올리다 보면 결국 깨닫게 된다. 여행지란 장소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나’가 머무는 곳이라는 걸. 담양이 필요할 때가 있고, 전주가 그리운 날이 있고, 순천만의 바람이 위로가 되는 밤이 있다. 여수의 바다가 내게 숨을 돌리게 하는 날이 있고, 제주도가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네는 순간이 있다. 여행지는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개인적이다. 누군가의 명소가 내겐 아무 감흥이 없을 수 있고, 반대로 누군가에겐 평범한 장소가 나에게는 결정적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오늘 당신이 가장 보고 싶은 풍경은 무엇인가.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그곳이 아마 지금의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여행지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이미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면, 여행은 아마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신의 여행지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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