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였다는 사실
가끔은 스크린 속 주인공이 울고 있는데, 이유도 모른 채 나도 따라 울고 있을 때가 있다. 허구의 인물인데도, 마치 나보다 나를 더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드라마와 영화는 언제부터인지 내 감정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고, 나는 자꾸만 그 거울 앞에서 숨겨둔 내 얼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감정이입은 그렇게 스며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깊고 또렷하게.
장면 하나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한 장면의 빛, 혹은 배우의 미세한 숨결이 오래전 내 감정을 건드린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화면에서 갑자기 살아나고, 주인공의 고백이나 침묵, 포기, 절망이 내 체온과 섞여버린다. 누군가의 상처가 내 상처의 모양과 너무 닮아 있을 때, 나는 그 장면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다. 마음이 먼저 젖어온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스스로의 삶보다 타인의 서사에 더 쉽게 흔들릴까. 왜 내 일에는 무던하면서, 허구 속 인물에게는 무참히 무너질까. 나는 오랫동안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감정이입은 남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결국 ‘나를 향한 숨은 문’이라는 걸. 누군가의 눈물이 내 눈물샘을 열게 되는 건, 그 눈물 속에 내가 오래 묵혀둔 감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포기하면 내 실패가 떠오르고, 그들이 무너질 땐 나의 낙심이 되살아난다. 결국 내가 느끼는 건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닮아 있는 내 버전의 그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장면들은 나를 무너뜨릴 만큼 깊게 파고든다. 주인공이 숨겨둔 진심을 고백하는 순간, 나는 바닥 깊이 묻어둔 말들을 떠올렸고, 늘 괜찮다며 덮어두었던 감정들이 문틈으로 스며올랐다. 어느 날은 그 장면 때문에 하루 종일 먹먹했고, 또 어떤 날은 그 대사 한 줄에 오래 묵힌 감정이 터져버렸다. 나는 내 감정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는 듯한 그들의 순간을 보며, 오래된 어둠과 마주했다. 감정이입은 그렇게 나를 구조하기도 하고 침몰시키기도 했다.
문제는, 나는 그 침몰을 자주 겪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나는 타인의 서사를 지나치게 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지고, 누군가의 절망이 어느새 내 몸에 고여버리고, 심지어 그 인물이 느끼던 상처의 잔상이 현실의 나까지 갉아먹을 때도 있었다. 허구에서 빌려온 감정인데도 무게는 진짜였다. 감정이입은 내게 날개를 달기도 했지만, 때때로 발목을 붙잡는 그림자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가볍게 보려고 틀어놓은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참았던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이 나왔다. 평온하게 앉아 있던 나는 그 장면에서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이상하게도 내 가족도 친구도 알지 못하는 종류의 슬픔이었다. 순간 깨달았다. “이건 내 일인데… 내가 숨겨둔 상처인데…” 그제야 알았다. 내가 주인공에게 이토록 깊게 스며든 이유를. 나 스스로 꺼낼 용기 없던 감정이, 스크린 속에서 먼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깊은 감정이입은 때때로 나를 소진시켰다. 누군가의 서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내 이야기는 희미해졌다. 그들의 감정이 밀려오는 동안 나는 내 감정을 잠시 접어두었고,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감정이 어디까지인지, 타인의 감정이 어디까지인지 경계가 흐려졌다. 남을 이해하느라 나를 잃어버리는 일. 감정이입의 가장 큰 그림자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배워야 했다. 감정이입은 내 감정을 버리고 남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 얇은 창을 두고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동안 누구의 창이든 열리면 망설임 없이 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등장인물의 무너짐에 내가 같이 무너지고, 그들의 절망을 내가 대신 끌어안고, 그들의 상실을 내 상실처럼 품어버렸다. 그건 이해가 아니라 잠식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감정을 막는 게 아니라, 흐르는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몰입하되 휩쓸리지 않는 법을 익혔다. 공감하되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감정이입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지만, 그 거울 속으로 들어가 버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감정이입을 조금 더 맑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안다. 감정이입은 약함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유연하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타인의 감정을 나의 감정처럼 느끼는 일은 결코 가벼운 능력이 아니다. 이런 능력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을 잃은 사람의 마음에도 손을 내밀 수 있다. 감정이입이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빠르게 굳어버리고, 우리는 서로의 온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욱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감정이입은 ‘무장해제’가 아니다.
감정이입은 ‘관통당하는 일’이 아니라 ‘닿는 일’이다.
닿기는 하되, 쓰러지지 않는 거리에서 닿는 것.
이게 이제야 알게 된 가장 중요한 균형이었다.
이 균형을 찾으면서 나는 내 감정에 작은 방을 하나 만들었다. 타인의 슬픔이 들어올 수 있지만 눅눅해지지 않는 방, 타인의 눈물이 머물 수 있지만 잠기지 않는 방, 타인의 절망이 잠깐 머물다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 이 방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감정관리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감정이입은 전보다 더 깊어졌지만,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 속 인물에게 마음을 내어주면서도 내 자리를 잃지 않았다. 주인공의 절망이 나를 찌르지 않고 스쳐 지나갔고, 주인공의 상실이 내 감정의 바닥을 뒤흔들지 않았다. 대신 그 감정은 부드럽게 흔들리고, 잦아들고, 나를 조금 더 넓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사람들이 드라마와 영화에 감정이입하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그 이야기 속에,
그 주인공 속에,
그 눈물 속에 나의 조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젖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 안의 오래된 슬픔과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하는 선택에 흔들리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가 하지 못한 선택과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상실에 아파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의 잔해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이입은 남을 이해하는 기술이 아니라, 오래 방치해 둔 나를 깨워내는 통로다.
타인을 지나 내게 도착하는 길.
허구를 지나 현실의 나를 만나는 문.
나는 여전히 드라마 속 인물에 쉽게 흔들린다. 그러나 이제는 그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흔들림은 나를 무너뜨리는 파도가 아니라, 내 안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물결이기 때문이다. 감정이입은 결국 나를 잃지 않고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이다.
나는 오늘도 이야기를 본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를 본다.
감정이입이란 결국,
타인의 마음에 스며드는 척하며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에게 도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