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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Feb 14. 2023

멍청한 외국인과 분필로 그린 거대한 말 그림

바보짓은 더 원대한 바보짓을 꿈꾸게 한다.

 영국에 왔으니, 영국 대표 컨텐츠 중 하나인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제목을 지어봤다. 길고 긴 제목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최근 흥하고 있는 웹소설 판에 긴 제목이 판을 치게 된 것은 일본의 라이트 노벨이 원인인 것도 있지만, 해리포터가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라떼의 라이트 노벨은 '은하영웅전설', '델피니아 전기'등 6자에서 제목이 끝났기 때문이다. 사설은 끝내고 본격으로 들어가 보자면 한국에서도 별로 똑똑지 못했던 나의 바가지는 바깥에서도 줄줄 새고 있다. 하지만 이는 내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외국인이라 멍청해지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다. 어디에선가 '그랜 토리노'를 리뷰하는 글을 읽었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한 '월트 코왈스키'가 미국의 전통적인 보수주의의 종말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의 부모세대는 폴란드계 이민자로서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차별을 당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한 포스팅이었다. 미국에서 폴란드계는 멍청하다는 농담의 소재로 쓰인다는데, 아마 폴란드계 이민자들이 다른 이민자들보다 영어를 더 못해서 멍청이라는 오명을 썼을 것이다. 영국은 그래도 살기 많이 불편한 나라는 아니지만(불편한 점이 있긴 하다.), 영국에 아직 적응을 못해서 나의 멍청한 순간들이 간혹 생긴다.


 오늘의 멍청이 모멘트는 기차 때문에 일어났다. 런던을 서울이라고 치면, 지금 사는 곳은 괴산쯤 되는 소도시인데 소도시라도 기차 플랫폼이 6개나 된다. 서울에서 지하철은 그냥 방향만 맞춰 타면 됐지만 이놈의 기차는 자꾸 방향이 바뀐다. 그리고 파업도 많이 한다. 하여튼 나는 Paddington(곰돌이 나오는 패딩턴이 맞다.)행 열차가 1번 플랫폼에 도착한다는 것을 보고 기차를 탔다. 기차는 런던의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Paddington이 아니라 Paington행 열차였다. 방송을 들으면서도 발음이 비슷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엄청난 오판을 저지른 것이었다. 구글 맵에서 내 위치가 런던과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한국말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 x 됐다." 결국 Pewsey라는 역에서 내리긴 했는데, 이도 제대로 읽을 줄 몰라서 '퓨씨? 어감이 좀 구린데......'같은 생각을 뇌까렸다. 퓨라고 읽더라.


 퓨역은 대학시절 강촌으로 MT 가는 길에 봤던 간이역 같은 작은 역이었다. 비싼 영국 기차 삯에 달달 떨며, 역무원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주절주절 떠들며 괴산까지 기차표를 다시 사야 하냐고 물어봤다. 제루샤가 상상했던 키다리 아저씨 같이 생긴 친절한 역무원은 그랬다.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모를 테니 그냥 타고 가세요. 그리고 런던행은 육교 건너서 반대편입니다." 생전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퓨지역의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자니, 역무원 아저씨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폴, 저는 내일에는 여기 없으니깐, 표는 온라인으로 뽑아요. 그리고 여러분 토요일부터 일주일간 이 역에서 기차 운행 안 합니다. 스윈던이나 다른 데 가서 타세요~" 역무원이 동네 사람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아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작은 동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영국은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유적이나 특이한 자연경관 하나하나에 안내판을 꽂아두는 경향이 있다. 퓨 역에도 자기 동네의 역사와 자랑거리를 붙여놨는데 그걸 읽다가 이 한국인 멍청이는 깜짝 놀랐다. 바로 거대한 말 그림 때문이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학급문고라는 게 있었다. 학생들이 각 집안에서 짬처리 하고 싶은 책들을 모아다 빌려주는 공간이었는데 거기에는 꼭 '공포특급'이나 '세상의 불가사의들' 같은 재미는 있지만 시시한 책들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불가사의 중 하나는 영국의 벌판에 그려진 거대한 말 그림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독일군 비행기가 공습의 지표로 삼지 못하게 덤불로 가려뒀다는 사족까지 기억날 정도로 인상 깊었다. 영국인들이 자기들의 거대한 지상화를 나름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IELTS 공식 문제집에도 영국의 지상화와 관련된 지문이 있었다. 물론 어디에 무슨 말 그림이 있는지 지명까지 기억할 정도로 나는 똑똑하진 않았다.


작디작은 퓨지 역
퓨지 관광 정보에 들어간 말 그림

 퓨의 안내판에 말 그림 형상을 보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로마시대 전에 그려져서, 비행기에서도 볼 수 있는, 2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할 때 나오기도 하는 그 말 그림이 우리 동네에서 기차 두 정거정 밖에 안 떨어져 있다니!! 런던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말 그림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일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차내검표를 해서 내 표를 보여주며 검표원에게도 내 사정을 주절주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검표원 아저씨도 '실수라서 괜찮고, 네가 퓨에서 괴산까지 타고 가는 건 아무 문제없어.'라며 넘어가줬다. 집에 돌아와 white horse of Pewsey를 검색해 보니, 푸른 들판에 분필가루로 광대하게 그려진 멋진 말 그림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내 기억과 다르게 18세기에 처음 만들어져 1939년에 조지 6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보수되었다고 위키디피아에 설명되어 있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chalk white horse in the UK를 검색해 보니, 벌판에 그려진 다양한 말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학급문고에서 처음 본 말 그림은 '핑턴의 백마'였다. 퓨의 백마는 짭이었던 것이다.


다양한 분필그림들

 단순 구글링한 결과에 따르면, 영국에는 공식적으로 16개의 거대한 분필 말 그림이 있다고 한다. 원조는 핑턴의 백마였겠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 21세기가 되어서도 - 벌판에 분필로 지상화를 그리는 것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한국의 지자체들 이상한 조형물을 세워대는 이유랑 비슷한 것일까? 한국은 산이 많아 생산성을 포기하고 저런 짓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남는 게 평지다 보니, 땅에다 분필을 뿌려 그림을 그리겠다는 포부를 갖게 하는 것 같다.


 오늘의 바보짓을 배우자에게 얘기하면서 영국에는 수많은 분필 지상화가 있으며, 그중 두 개는 집에서 차로 40분 내에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내 배우자는 그 많은 수에 놀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전부 다 다니면서, 도장 깨기라도 해 볼까?"

바보짓은 더 큰 바보짓을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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