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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Mar 28. 2023

군밤장수 잠바와 워커

바버자켓과 닥터마틴 워킹부츠

 기억에 의하면 여의도에 군밤장수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쯤이었다. 진짜 군밤을 파는 건 여의도 공원 횡단보도 앞에 계신 아저씨뿐이었지만, 바버의 비데일 자켓이 이때부터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가을에 군밤룩을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끔 바버자켓을 두고는 '저게 양놈들이나 입어야 멋지지, 조선 놈들이 입어서 간지가 나냐?'며 혀를 차는 자들이 있었지만 군밤장수 잠바는 그러한 비난과 상관없이 꾸준히 인기를 얻어갔다. 내가 여의도를 떠나기 전에도 비데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델을 입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국방색 원단에 갈색 골덴 칼라를 보면서, '코트나 입지 후줄근하게 저게 뭔가?'라고 생각했던 나도 영화한편을 보고 군밤장수 대열에 끼어들게 되었다. 비록 진짜 왁스 자켓은 아닌, 왁스 자켓을 흉내 낸 야상 하나를 사면서 말이다.


 짭왁스 자켓을 사게 된 계기는 '미 비포 유'였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쓰레기 같고, 여주인공의 패션센스는 에밀리 인 파리의 에밀리만큼 나쁘지만, 남자 주인공의 귀족 엄마와 전 여자친구의 옷보는 재미가 있었다. 주인공의 엄마가 바버 자켓을 입고 나오는데 배우도, 옷도 근사해서 내가 입으면 군밤장수가 되더라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버의 자켓에 대한 구매욕구는 미디어가 주는 효과가 주변인들이 주는 효과보다 훨씬 뛰어난 편인 듯하다. 패션이라는 게 다들 그렇기는 한데, 바버자켓은 솔직히 주변 사람들이 입고 다니면 그저 군밤장수 같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바버자켓을 입고 나오는 이들은 시골의 거대한 목장 한가운데 큰 저택을 소유한 영국의 귀족 나으리들이라 포쉬한 저들의 꾸안꾸 아이템을 나도 하나 입어보고 싶어 바버공홈을 기웃거리게 된다. 실제로  넷플릭스의 '더 크라운'시리즈에서 다이애나비 역할을 맡은 배우가 바버자켓을 입고 등장한 이후로 바버의 매출이 폭발적을 증가했다는 기사가 있다. 심지어 이 드라마의 그 시즌은 "바버자켓 포르노"라고 표현한 매체도 있다.


Barbour jacket porn으로 명명된 넷플릭스의 "The crown"의 일부장면과 실제 왕족들의 바버자켓 착용사례.

 이렇게 구구절절 쓰고 나니, 내가 귀족적인 것을 선망하는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영국에 오고 나니 내가 공화국에서 공화주의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국에 오기 전에는 코스튬 드라마를 좋아했지만, 여기 오고 나니 신물이 날 지경이다. 어쨌든 2016년의 나는 바버도 아닌, 다른 브랜드의 왁스자켓 흉내만 낸 왁스자켓 처럼 생긴 자켓을 사서 10월 말부터 12월 초까지의 쌀쌀한 한국 날씨를 잘 버텨왔다. 가짜 왁스자켓이지만 방수가 잘되는 그 자켓은 영국에 와서 더 빛을 발했다. 망할 놈의 비가 문자 그대로 매일 내리는 데다, 우산을 써도 비바람이 들이치기 때문에 나의 짭 왁스잠바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쓰는 게 집 밖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겨울의 영국날씨는 바버자켓 뿐만아니라 닥터마틴의 워커 역시 빛나게 한다. 눈이 많이 내린 다음 날 질척이는 길거리를 워킹부츠와 함께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국인들을 보고 역시 모든 것은 기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제러드 다이아몬드여!! 여의도에서 알고 지냈던(더 이상 절대 알고 지내지는 않는) 어떤 사람은 영국에서 오래 살아서 영국 부심으로 가득 차 있는 자였는데, 언젠가 닥터 마틴이 지닌 깊은 뜻을 아냐며 한탄을 했다. 그의 말인즉슨 닥터마틴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과 저항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신는 신발인데, 한국 사람들은 깊은 뜻은 모른 채 그저 멋으로 신는다는 였다. 그가 얘기를 한 날 키움증권 건물 1층에 있던 프랜차이즈 카페는 너무 상업적이라 싫다며, 태성 골뱅이로 나를 끌고 갔기 때문에 그저 개소리로만 들렸다. 찾아보니 닥터 마틴이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영국의 구린 날씨 때문에 영국 사람들이 닥터마틴을 즐겨 신을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저항정신은 모르겠고, 대학 신입생 시절 두산타워에서 싼 맛에 닥마 짭을 사서신은 전적이 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두산타워에서 2003년에 3만 원 주고 산 짝퉁 닥마는 신고 다닌 지 2개월 만에 밑창이 떨어져서 버렸다. 2016년에 산 바버도, 왁스자켓도 아닌 디자인만 왁스자켓 같은 나의 자켓은 6년 좀 넘게 입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지만 브랜드는 영국제라 튼튼하긴 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오늘 보니 왼쪽 손목의 솔기 부분이 해져서 찢어져있었다. 손목의 뜯어진 부분을 사진 찍어 보내니, 배우자가 답했다. "이제 진짜 영국사람 같네. 걔들처럼 그냥 입고 다녀." 영국사회에 편입되지도 않았지만, 대한민국의 공화주의자로서 배우자에 대한 저항정신을 표하기 위해 이번에는 진짜 바버자켓을 사 입어야겠다.

 

6년 동안 함께해온 나의 군밤장수 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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