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리먼 브라더스'의 시작보다 끝에 익숙할 것이다. 한때 월 스트리트하면 떠오르는 이름 중에 하나였으며,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결국 구제받지 못해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회사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먼 브라더스의 끝은 마이클 루이스의 '빅숏'과 이를 기반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잘 설명해주고 있으며, 당시 연준의장인 벤 버냉키와 친구들의 회고록에도 정리가 잘 되어있다. 하지만 시작은 어떠한가? 골드만 삭스처럼 유대계 자본이겠거니 하는 짐작은 할 수 있다. 초기 리먼 브라더스는 상사업과 유사한 목화의 중개가 본업이었고, 뉴욕이 아닌 앨라배마가 근거지였던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금융사(史)에 미쳐서, 유수의 증권사와 운용사, 투자 구루들의 내력을 줄줄이 꿰고 있지 않는 한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 바닥의 이야기는 성공과 수익의 신화가 아닌, 사기와 실패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제대로 된 교육과정이 있는 증권사에 입사하게 되면 교육기간에 시간 때우기 용으로 영화를 몇 개 보여주는데, 내 시절에는 '로그 트레이더'였으며, 요새는 아마 '빅숏',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진 콜'을 보여줄 것 같다(사실 모르겠다.).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성공담보다는 금융업계에 만연한 사기와 방종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로 그만큼 교훈적이다. 좀 더 교육적으로 성공사례를 보여주면 어떨까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과 반대로, 망하는 금융사는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잘되는 회사는 제각각의 성공비법을 안고 있기 때문에 신입사원들에게 성공사례를 주입하기보다는 실패의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세 배우가 번갈아 가며, 대사를 주고받기보다는 서사시를 읇는다. 고도의 계산된 연출이 필요한 연극.
무대는 회전하는 심플한 유리 사무실로 상상에 제약을 두지 않으며, 회전 을 통해 영화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연극 "The Lehman Trilogy"는 투전판 바닥을 기반으로 한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다. 2008년의 붕괴보다는 회사의 창업자들과 성장기를 중점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리먼 형제들 중 가장 큰 형이자 '머리'인 헨리 리먼이 미국땅에 발을 밞으며 대사가 시작된다. 헨리의 본명은 헤이윰으로 이민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의지가 없는 미국인들을 위해 헨리로 개명한다. 객석에서 최초로 웃음이 터지는 장면인데, '헤이윰'과 비슷한 발음이 나는 이름을 가진 나로서는 영국인들의 반응이 다소 가소로웠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보면금융과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저 장면에서 이 연극은 근본적으로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꼈다.
헨리에 뒤이어, 둘째이자 '팔'인 '이마뉴엘'과 삶은 감자처럼 피부가 부드러워서 별명이 '감자'인 막내 마이어가 도착한다. 형제가 하나, 둘 도착할 때마다 리먼 브라더스의 사업은 확장되어서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옷과 옷감장사를 하던 '리먼 형제 잡화점'의 이름은 '리먼 형제 상회, 잡화, 옷감, 목화'등으로 길어지며, 결국 은행까지 붙게 된다. 리먼 브라더스는 미국의 역사와 더불어 도약한다. 리먼의 모체는 목화 중개상이었지만, 남북전쟁에도 큰 타격을 받기보다 주정부 채권 판매 대리인이 됨으로써 금융회사로 변신한다. 그러면서 동력을 잃은 남부를 떠나, 뉴욕에 정착한다. 뉴욕에서 리먼은 목화를 거래하는 상품거래소 설립에 기여하는데 연극은 거래소를 설명하면서 금융의 본질을 꿰뚫는다. '목화를 거래하지만 목화가 없고, 커피를 거래하지만 여기에는 커피가 없다. 그저 목화라는 말, 커피라는단어들이 있을 뿐이다.'
리먼의 초대 창업자인 이마뉴엘과 마이어가 죽고(헨리는 일찍 죽는다.) 이마뉴엘의 아들인 필립이 회사를 이어받는다. 필립은 매일 일기에 당시의 상황을 쓰고,상황에 맞는 유망한 산업을 찍는다. 그리고 필립은 늘 성공한다. 연극은 '필립은 돈을 벌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결정만을 내린다'는 대사로 투자에 있어서 그의 천재성을 표현한다. 이 부분은 주식쟁이로써 무릎을 치게했는데, 펀드 매니저들도 작두를 타는 시기에는 투자 결정에 확신이 가득 차고, 투자의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속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다. 필립도 자신감을 잃는 순간을 겪게되며, 더 이상 무엇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는지 안보인다고 절규한다. 전직 주식쟁이로써 뭘 사고팔아야할지 안보일때의 절망을 알기 때문에 깊이 공감하며 볼 수 있었다. 결국 필립 역시 죽는다. 이후, 리먼 브라더스에서 리먼가족 중마지막으로 이사회에 이름을 올리게 된 그의 아들 바비가 회사를 물려받는다.
연극 안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죽음에서 결국 이민자의 후손들이 처음 이민온 그의 선조들에게서 얼마나 멀어지는지를 되풀이하며 보여준다. 극중 첫 죽음인 헨리의 사망 후 남은 리먼 형제는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동안 형의 죽음을추도한다. 이마뉴엘과 마이어가 죽었을 때는 단 하루의 추도시간이 있었다. 필립이 죽었을 때는 리먼 브라더스에서 단 1분 만의 묵념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연극은 유대계 이민자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유대어 대사와 유대문화들이 나온다. 1세대들이 나오는 장면에서의 유대어 기도는 경건하며, 비록 이들이 정경유착을 통해 돈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종교에 대한 신실함 때문인지 어딘가 순수하게 보이기도 한다. 세대를 내려갈수록 유대계라는 정체성에서 멀어지며 결국 가족은 리먼 브라더스라는 회사를 떠난다. 첫째 헨리의 장례식 장면에서 배우들이 유대어 기도를 읊조리는 것을 보며 필시 저 장면이 끝에 다시 나올것 같다는 예측을 했는데 역시나였다. 예상 가능한 바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의 울림은 컸다. 사업에서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뒀어도 창업자 가족이 4대 이상을 이어가기가 어려우며, 처음 가지고 있던 이상과 꿈이 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작은 미약하고, 성공은 창대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면 미약한 것으로 되돌아간다. 끝은 끝이므로 영원히 창대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