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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Jun 12. 2023

Butler to the world - 영국의 집사금융

누가 금융허브 소리를 내었는가?

 가끔 잊을만하면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한국에도 국제 금융허브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있다. 체감상 10년 주기로 나오는 말인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오래된 드라마의 궁예 마냥 "누가 금융허브 소리를 내었어?"라고 호통치고 싶어 지게 된다. 답은 알고 있다.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외치는 것은 정치인들이요,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의도 사람들이다. 직장에 다닌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할 수만 있다면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순진한 생각을 했으나, 그때에도 그 바닥에서 밥 벌어먹는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혹자는 한국의 금융허브큰 걸림돌로 꼽히는 것이 바로 잠재적 경쟁도시에 비해 영어소통이 안된다는 것을 꼽는데, 과연 영어뿐일까? 다들 답을 알고 있지만, 거론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다. 하여튼 최근 뉴스에 따르면, 서울시는 여의도의 건물 용적률을 1200%로 풀면서, 여의도를 글로벌 금융 중심도시로 우뚝 세우겠다(?)고 하는데, 한국처럼 겉으로 도덕적 명분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부동산 관리회사들과 증권사들이나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누가 금융허브 소리를 내었어?

 한국의 개인 자산관리(보험이 아닌 진짜 Wealth management) 업계에서 내놓으라 하는 PB들 중에는 고객이 나라별로 자산을 분산시키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단순히 한국의 한 증권사 계좌에서 여러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현지에 갔을 때 현지에서 바로 인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부자들의 마음이 이해는 간다.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괜찮을 법한데,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고 있어 한국 최고의 고객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증권사 직원이 고민하는 것을 보면, 뭔가 현실적인 제약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분산까지는 아니라도, 외국 부자의 돈을 잘 짱박아서 관리해 주는 나라가 있다. 바로 영국과 영국령의 섬나라들이다.


  'Butler to the world'는 영국과 영국령 국가들의 조세 회피산업을 설명한 책이다. 저자인 올리버 벌로우는 영국의 금융 서비스를 영국의 유명 코미디 쇼인 'Jeeves and Wooster'의 주인공들을 빗대어 '집사 서비스'로 표현한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에즈 운하를 잃으면서 패권국가의 지위를 상실하고 자구책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집사 서비스인데, 매너, 유능함, 신중함이라는 영국 최고의 가치가 '주인'으로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하기보다 아부 떠는 하인들에게 적합한 품위로 용도변경되었다고 설명한다. 유로본드로 역외시장을 팽창시키면서 이러한 집사 서비스는 고도화되었다. 영국령이지만 영국이 아닌 섬나라들이 영국의 규제를 피해 갈 수 있게 하고, 중복되는 감독 당국의 존재가 금융범죄 크로스 체크를 불가능하게 하여 회색지대를 광범위하게 용인하는 점이 러시아 석유재벌들이 영국의 금융집사들을 가장 활발히 활용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왕성한 집사 금융은 이시구로 가즈오의 'The remains of the day'의 주인공이 '나는 그저 집사이기 때문에 내 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Butler to the World 표지

 이 책을 읽다 보면 금융허브를 건설하는데 필수적인 것 두 가지를 다시 깨달을 수 있다. 첫 번째로, 영어를 쓰고 영국과 유사한 법률 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 두 번째로, 조세회피적일 것이다. 한국인이 영어 못하고, 법 체계가 영미권과 다르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세율 있어서 납세자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금융 허브란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서 세금 내기 싫어서, 세금이 낮은 곳으로 돈이 몰리는 곳이 바로 금융허브다. 한국은 얼마나 조세 회피적인가? 필자는 학부시절 세무회계시간에 세법의 복잡함에 진저리를 쳐서 한국 세법의 정성평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하지만 단순 숫자 비교는 가능하다. 법인세의 경우, 한국은 전 세계 225개 나라 중 156번 째로 세금이 낮다. 높은 순서대로 따지면, 68번째다. 흔히 알려져 있는 조세 회피처들 - 바하마, 버뮤다,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케이만 군도, 건지 섬, 만 섬, 저지 섬 -의 법인세는 0%이다. 다른 국가들과의 법인세율 아래 표를 참고하면 된다.



국가별 법인세 비교. 출처 : https://taxfoundation.org/


 배당과 이자소득세는 어떠할까? 조세 회피처들과 이른바 금융허브로 알려져 있는 도시국가들의 이자 및 배당소득세는 0%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싱가포르만 이자소득세가 15% 일뿐이다.

 

국가별 이자 소득세율. 출처 : OECD
국가별 배당 소득세율. 출처 : OECD

 어잖게 금융허브를 외치기에는 한국은 곳곳에서 골고루 세금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그만큼 세수원이 다양하고, 산업구조가 알차다는 뜻인 듯하다. 흔히들 '금융은 산업의 시녀'라고들 한다. 올리버 벌로우도 그런 점에 착안하여 자국의 금융산업을 집사 산업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주기적으로 정치인들과 지자체에서 금융허브를 내세우는 것도 일견 이해는 간다. 아마 높으신 분들은 서여의도에 차명으로 오피스텔 많이들 사뒀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세율이 전혀 전혀 조세 회피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형 금융허브는 요원하다. 한국이 다른 나라 돈의 도관 역할을 하려면 과연 어느 나라 부자의 탈세를 도울 수 있을까? 자금의 도관보다는 타국으로의 도피역할을 도와주는 쪽이 더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인 듯하다.


 'Butler to the world'를 읽으면서, 왜 한국이 금융 허브로 도약이 불가능한지를 되새기면서, 영국 사회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내가 사는 시골 동네에도 도박장이 있는가? 왜 러시아 사람들이 런던에 비싼 집을 가지고 있는가? 왜 내가 다녔던 비싼 어학원에는 돈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많은가? 어떤 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공개적인 글에는 담기 어렵지만 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울리가르히들의 영국에 예치해 놓은 자금에 대한 제재강화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는 듯하다. 올리버 벌로우가 외치는 도둑 정치의 타도까지는 어려워 보이지만, 결국 그들에 대한 제재가 자신들의 밥줄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방이 궁금하다. 나의 모국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힘든 밥타기를 하고 있지만, 패권 없는 국가라는 게 다들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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