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Q의 영국생활
정신승리 없이는 버틸 수 없다.
영국생활의 뭣같음의 삼위일체를 말하자면, 뭣 같은 겨울 날씨, 뭣 같은 수준의 음식 그리고 사람을 말려죽이는 생활물가를 들 수 있다. 이 곳에서 오래 살아온 교민들은 필자와 같은 사람을 두고 일상생활의 감사함을 모르는 투덜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마인드가 탑재되어있지 못한 사회 부적응자로 치부하는데, 나야말로 그들을 영국생활의 구질구질함을 애써 외면하는 정신승리자라고 말하고 싶다. 이곳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금새 할 것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나라에서 '언젠가는 좋은면이 보이겠지.'라고 근거없는 낙관론을 펼치면서 근성으로 버티기에 이제는 주제파악이 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린시절을 부모님이 틀어주던 비틀즈와 앤드류 로이드 웨버를 들으며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으며 자랐고, 청년기를 콜드 플레이, 워킹 타이틀의 영화와 함께하며 영뽕을 맞았어도 이곳에서의 삶이 "나"에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나는 이제 정말 영국이 싫고, 영국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것을 몸서리치게 '느낀 것'은 두번이나 된다. 첫번째는 영국에서 살기 시작한지 반년 쯤 지나고, 포르투갈에 갔다가 리스본 기차역에서 100m 밖에서 봐도 영국인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노부부를 만났을 때다. 포르투갈 철도의 파업으로 기차표를 환불해야했는데, 그들에게 여기서 줄 서면 되는지를 물어보니, 그들은 영국인 특유의 친절함을 보이며 스몰톡을 시작했다. 마침 그들이 살던 동네가 내가 사는 동네랑 가까워서 좀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를 마무리할 때 쯤 노부인이 영국의 삶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사십대에 접어들었고, 한국에서도 상당기간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동네 할머니 비위 같은 건 맞출 정도의 사회화가 되어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2초 정도 얼어버렸다. 흔쾌히 너무 좋다고 입에 침발린 말이 안나왔던 것이다. 간신히 너희 나라의 문화적인 부분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고, 영국에 살아서 그걸 직접 느낄 수 있어서 좋다고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그들도 내가 내 영국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 일이 있고나서 까짓것 노인네들 기분 하나 왜 못맞춰줬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나 나는 이곳을 좋아하고 있지 않다고 솔직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는 석사를 시작하고서였다. 내가 몸담고 있는 단과대 건물의 바로 옆에는 큰 교회가 있는데, 예전이었으면 묘지가 있었을 교회의 앞마당에는 터키인 아저씨, 아줌마가 터키식 샐러드와 양고기 랩을 파는 컨테이너가 있다. 그 두 사람이 부부인지, 모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연상연하 커플처럼 보이기도 하고, 좀 젊어서 얻은 아들과 같이 장사를 하는 모자같아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가게에서는 심지어 커피도 파는데, 수업을 듣다가 쉬는 시간에 카페인이 부족하면 달려가서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빨고 다시 수업을 들어가기도 했다. 그 날도 쉬는시간에 튀어나가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을 때였다. 아저씨는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말로 잘지내냐고 물어보았다. 또 가식적으로 '아주 좋아'라는 말이 안나왔다. 속사포처럼, 솔직히 말해서 너무 안괜찮고, 도대체 영국이 좋아지지가 않으며, 빨리 떠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아저씨는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너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실 자기도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기에 너무 늦어서 그냥 산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아주머니를 곁눈질하면서 "사실 저 여자도 영국 엄청 싫어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영국이 싫은 이유를 말하자면 구구절절 엄청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곳에 오기 전에 유럽의 햇빛 부족한 다른 나라에 사는 동생이랑 통화를 했을 때, 그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여기 오시면 우리가 여의도에서 얼마나 혜택받은 삶을 살고, 잘 지냈는지 깨닫게 될거에요. 오면 내 자신이 무엇인가, 어떤 인간인가인지를 바닥부터 해체해서 재조립 하는 과정이 있을거에요." 그 친구의 말이 맞았다. 나의 상식과 그들의 상식, 나의 선호와 그들의 선호가 다 달라서 이렇게 같은 사람인데 다를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들의 솔직한 면모를 보면 다들 사람사는게 다 똑같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살면 살수록 같은 사람이라는데에서 연민을 느낀다. 특히나 이렇게 삶이 팍팍한데, 타인에게 겉으로라도 친절할 수 있는 영국인들의 마인드와 체력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나와 그들의 다른 점, 특히 속도의 차이를 느낄 때마다 속에서 불이 타오른다. 특히 이곳의 기차는 나를 돌아버리게 한다. 한국으로 치면 괴산 정도규모의 천안정도 위치의 동네에서 런던으로 통학을 하는데, 월간 정기권의 가격은 550파운드 정도한다. 월 90만원을 천안-서울 통근에 쓰는 것이다. 그나마 이게 가장 싸게 다닐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러한 생활 필수 비용은 미친듯이 비싼데, 그렇다고 품질이 좋으냐면 그건 아니다. 체감상 거의 이삼일에 한번 꼴로 연착을 당하거나, 취소가 된다. 좀 일찍 출발하면 안되나?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봤다. 하지만 한시간 일찍 나갔더니 또 취소돼서 원래 탔어도 되는 기차를 타고 정시에 도착했다. 뭔가를 미리 앞서서 알아서 잘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곳이다. 처음 영국에서 기차를 타기 시작했을 때는 연착이 되어도 보상신청을 따로 안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약올라서 악착같이 한다. 15분 늦으면 3,4파운드 정도를 되돌려주고, 30분 이상 늦으면 7파운드를 되돌려 준다. 2주 사이에 5번 돈을 돌려받았다. 이게 무슨 비효율인가 싶다. 오늘 이렇게 영국 욕을 질펀하게 싸지르는데는 또 기차 때문에 빡쳤기 때문이다. 예고없이 기차가 취소돼서 수업에 20분 늦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애를 만들었으면 내 자식뻘이었을 아이들이 "야 너 또 늦었네" 라고 놀렸다. 얘들은 내가 서울에 있을 때 5시에 일어나서, 아침운동을 하고 7시 반이 되기 전에 사무실에 출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기차가 연착되어서 제시간에 도착해야할 곳을 못가고 런던 근교의 슬라우 라는 동네를 거북이처럼 지나갈 때, 내 속은 부글부글 끓어 오르지만 차안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그 광경을 보면 지극히 고독하고 쓸쓸하다. 화가 나있는 것은 나 혼자 뿐인 것 같기 때문이다. 딱 한번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레딩 역에서 기차가 또 취소됐으니 다 여기서 내리라는 안내에 어떤 아저씨가 "Oh, Fuck"이라고 한숨섞인 욕하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나 혼자만 화가 났던 것은 아니었다.
몇 주전 한국에 갔을 때, 영국은 나와 너무 안맞는 곳이라는 푸념을 친구들에게 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인도, 네팔 같은 곳을 떠돌면서 산 친구가 충고를 하나 해줬다. 이 세상에 기차가 제때에 오는 곳은 한중일 밖에 없으니 내려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영국에 돌아와서 그래도 예쁜 점을 찾아서 좋아해 봐야지라고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 영국 기차는 너무 화가 난다. 다시금 그 친구에게 역시 좋아지지 않는다니 또 다른 충고를 했다. "이 불쌍한 인간들은 평생 이러고 살거라고 생각해봐." 이번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그 생각은 이백번 쯤 했기 때문이다. 아큐의 정신승리를 하면 버틸 수는 있지만 극복은 안된다. 그리고 영국은 은은한 뭣같음과 직접적인 뭣같음을 상쇄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 아니다. 그저 구질구질할 뿐. 아마 여기가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였으면 나도 정신승리를 하며 버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정말인지 살면 살 수록 왜 제임스 메이가 이탈리아 여행 프로그램에서 "La dolce vita"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이해가 된다. 영국에서 삶의 달콤함을 찾기 쉬운 곳은 Tesco의 제과제품 코너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즐겁기 어려운 곳이다.
최근 영국의 이슈 중 하나는 영국 우체국의 회계 프로그램 스캔들이다. 영국의 우체국은 한국의 치킨집 마냥 가맹점이 있는데, 서점으로 부르기에는 부족한 홍익회 같은 WH Smith라는 가게안에서 장사를 하기도 한다.영국 우체국에서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회계 프로그램의 오류가 발생했는데, 700명이 프로그램 오류를 횡령으로 덤터기 써서 전과자가 됐고, 그 중 일부는 세상을 져버러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90명의 사람이 재판을 걸어서 이겼다. 그리고 재판을 건 사람들만 유죄판결이 뒤집혔다. 이 사건이 드라마로 나와서 공론화가 되서야 정부는 부랴부랴 기소된 사람들을 전부 무죄로 돌려주고, 보상을 해준다고 나서고 있다. 16년이나 회계 프로그램의 오류를 못잡고, 전국적으로 난리가 나야 이제 보상을 해준다고 나서며, 막상 회계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인 후지쯔에는 별 책임을 안묻고, 아직도 그 회계 프로그램을 쓰는 일련의 모든 상황이 참으로 영국스럽게 느껴진다.
영국에서의 삶이 내게 부정적인 영향만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으로써 많은 기능은 개조를 당했는데, 이곳의 삶을 절대 장기적으로 지속하고 싶지 않다. 좋아하려는 노력을 할 때마다 그 노력이 하기 싫어지는 곳을 저주하면서 사느니, 빨리 떠나주는 쪽이 나와 이 나라에게 더 긍정적일 것이다. 떠나는 순간까지는 아큐마냥 "내가 병신이 아니라, 여기랑 안맞는 것이다. 안맞는 곳에서 아등바등 해서 무엇하나?"라는 생각으로 버텨야겠다.
아 그런데 진짜 너무 싫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