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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ix Feb 02. 2024

영국식 먹방

위장의 욕구인가? 영혼의 욕구인가?

 밥이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과 푸드 포르노인 '먹방'의 조합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현실이 막장 드라마를 이긴다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평소 먹방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다. 직접 먹는 것을 좋아하지 남이 먹는 것을 '보는 행위'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이 외식문화가 발달한 곳에서는 그저 직접 행하고 살찌면 되는 것을 무엇하러 복잡하게 남이 먹는 것이나 보면서 위안을 삼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나 자신의 한계를 깬 것은 식문화가 척박하기가 그지없는 영국에서였다니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하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


 어제는 학교에서 전공과 관련한 좌담회 같은 것이 열리길래, 영국 기준으로 늦은 저녁까지(한국이었으면 밤문화의 초저녁인) 런던에 있었다. 8시 반쯤 우리 동네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영국 사람들도 야근은 하는지, 피곤에 쩌든 직장인들이 하나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그나마 빈자리가 환갑은 넘은 것 같은 양복 입은 영감님의 옆자리였는데, 기차의 더 안쪽 자리로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앉았다. 앉자마자 조금 놀란 것은 영감님이 정말 공격적인 속도로 감자칩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자칩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소리가 마치 사흘 굶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사료를 씹어먹는 것 같이 들렸다. 감자칩 소리에 놀란 채로 코 끝에 풍기는 음료 냄새에 트레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상큼한 술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트레이를 보고는 아 이 영감님 좀 먹을 줄 아는데? 하 감탄했다.


 영감님 트레이의  왼쪽에는 M&S에서 파는 작은 와인병이, 가운데에는 감자칩이 있었다. 오른손에는 역시 또 M&S  PB상품인 패션 푸르츠 마티니를 들고 아주 야무지게 감자칩을 드시고 계셨다. 냄새만 맡아도 맛의 궁합이 끝내주는 술과 안주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패드로 뭔지 모를 드라마를 보면서 가열차게 감자칩과 칵테일을 조지던 영감님은 다시 와인 반 병과 남은 감자칩도 격파하기 시작했다. 감자칩  더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채 알레그의 속도가 유지되면서 소진되었다. 그렇고 나니 와인이 딱 반 병 정도 남았다. 야무지게 먹는 모습에 감탄하며 어떤 사람인지 은근슬쩍 곁눈질을 하게 되었다. 영감님이 입은 차콜 그레이 색의 양복은 원단이 굉장히 좋아 보였고, 넥타이와 안경도 꽤나 비싸 보이는 것이었다. 돈깨나 버는 양반으로 추정이 됐다.


 양손에 술병을 들고, 엄청난 속도로 반주를 하는 것을 보면서 이상한 희열과 만족감을 느꼈다. 솔직히 영국에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진정한 기쁨을 느끼면서 뭔가를 먹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가격이 저렴하면 맛이 흉악하고, 맛이 적당하면 가격이 흉악한 영국의 외식물가 탓인데, 고작 감자칩 한 봉지와 싸구려 술 두 종류에 더 먹을수록 효용이 체감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서 그의 영혼의 공허함이 충족되는 것을 느꼈다. 또한, 친절하지만 결코 가까이하기 어려운 영국인 엄청나게 솔직한 식욕을 보며 조금은 공감하며 내적 친밀감을 얻을 수 있었다. 취기가 오르면서 자세가 더 삐딱해지는 것을 보면서 모르는 아저씨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칵테일 한 캔과 작은 와인 한 병을 드시고 요의를 느끼셨는지, 화장실 좀 가게 잠깐 자리를 비켜줄 수 있냐고 영감님은 물었다. 외노자의 배우자로 이곳에 살면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비슷비슷한 외노자나 유학생들 정도인데, 이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지칭하는 단어는 외국인답게 rest room이거나 toilet이다. 단언컨대, loo라고 말하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어의 선택을 봤을 때, 영감님이 속한 소셜 클래스도 중상 이상은 되는 것 같아서 속으로 또 놀랬다. 영국에서 나름 신분도 있으시고(?) 돈도 좀 버시는(?)분이 감자칩으로 대충 때우면서 진정한 만족을 하는 것이 매우 생경했다. 저 영감님이 한국에서 살았으면 여의도의 국밥집에서 저녁때 혼자 조용히 순대국밥 특에 소주 한 병 기울이고 만족스럽게 집에 갔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감님의 먹방에 자극받은 나는 구루마 아줌마가 왔을 때 땅콩 한 봉지에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와인이 10도 밖에 안 돼서 좀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영감님이 불 지른 나의 음주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 방울을 털어 넣고 내 자리의 트레이에 빈 플라스틱 병을 놓은 순간, 기차가 흔들려서 와인 병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그것을 황급히 잡아채니, 영감님이 옆에서 "나는 경험이 더 많아서 안 그런다"며 낄낄 웃었다. 거기에 나는 "당신 때문에 내가 이거 시켜 먹었다."라고 응수했다. 한번 같이 낄낄거리고 나니 내릴 때가 되어 영감님과 헤어졌다.


 오늘은 저녁시간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퇴근하는 영국인들이 다 배가 고팠는지, 패딩턴 역의 M&S에는 손에 감자칩 봉지 하나를 든 영국인들로 장사진이었다. 어제 영감님이 선택했던 조합대로, 사워크림 감자칩과 패션푸르츠 마티니를 계산해서 기차에 탔다. 역시 조합이 좋은 안주와 술이었다. 하지만 역시 순대국밥에 소주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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