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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시캣 Jul 09. 2024

장녀가 쓰는 엄마의 일생 이야기.

(1) 엄마의 마지막 때

  우리 엄마가 우시는 모습을 본 적은 내 인생 통틀어 총 3번이었다. 대게, 옛말에 남자는 평생 3번 운다는 얘기가 있는데, 우리 엄마 평생에 걸쳐 3번 내 눈앞에서 우셨다.

  첫 번째는, 엄마가 아직 마흔이었을 때, 열한 살의 어린 딸이었던 내가 오뚜기 카레를 안 사다 준다고 그날따라 오기가 발동해 유독 때를 부렸을 때, 엄마의 눈시울이 붉었다. 두 번째는, 엄마가 정신이 없는 마흔 후반의 나이에 실수로 삼계탕을 닭의 목과 함께 아버지의 식탁에 내놓았을 때, 아버지가 심히 어머니를 말로 다그쳐서 엄마는 소리 없이 우셨다. 세 번째는, 쉰아홉 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때가 다가오는 걸 눈치챈 두 연년생 딸들, 나와 여동생 작별 인사를 할 때 소리 내어 흐느껴 우셨다.

  "엄마, 엄마가 우리들의 엄마로 있어줘서 정말로 기뻤어. 고마웠어."

두 딸들의 말에 엄마가 엉엉 우셨다. 이렇게 엄마가 소리 내어 우신 모습을 본 것은 나의 일생에서 처음이었다.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비결핵 항상균이라는 지병의 고통보다도, 생을 곧 마감하게 될 것 같은 엄마 본인의 일생에 대해 우시는 것 같았다.

  항상 본인은 꼭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사시던 엄마였다. 엄마는 골골 앓는 한 할아버지께서도 그 상태로 80,90까지 살다가셨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자신감을 종종 나타내시곤 했지만, 100세의 절반정도 되는 나이에 우리와 이별했다는 것이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계시는 것 같았다. 카카오톡 목록에서도 어느새 다른 사람이 전화번호를 가져갔는지, 엄마가 아닌 모르는 다른 이의 모습이 떴다.

  아버지께서는 엄마 영정사진을 준비하시면서, 결혼해서 두 아들들을 키우고 있는 나에게 같이 울고 싶어서 전화를 거셨다고 했다. "이것만은, 준비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는 소리 내어 엉엉 우셨고, 나도 그간 참았던 눈물이 터져 함께 울었다. 아버지께서는 이 나이에도 여전히 사업을 하고 계셨기에, 우시다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여전히 그 통화녹음이 내 전화기에 남아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때 아버지가 진심으로 우시던 눈물이 목소리에, 목 톤에서, 가슴에서 느껴지곤 한다.

  내가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낸 다음에도 엄마를 계속 추억하고 싶어, 그때 그 당시의 아버지와의 녹음을 간직했다. 생각해 보니, 두 딸들과 아버지께서는 오랜 세월 엄마가 아프신 걸 아시면서 아주 천천히,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처음 엄마가 비결핵 항상균에 걸린 해는 마흔 살 때, 딱 마흔 살 때였고, 나와 여동생은 11살, 10살 정도 됐었다. 그때는 일상에 지장이 거의 안 갈 정도로 엄마는 건강했던 것 같았다. 물론, 엄마 본인이 느끼는 몸의 아픔과 불편함은 다를지 몰라도. 엄마는 하지만, 매주 딸들과 아버지와 함께 등산도 다니고, 숨이 좀 찼지만 해외여행도 다닐 정도로 건강하고 활달했었다. 물론, 엄마는 두 아이를 출산했으니, 두 딸들이 엄마 몸의 영양분을 다 가져갔으니, 체력이 가족 중에 꼴찌였지만, 늘 뒤에서 할 수 있는 보살핌으로 우리 가족을 지지했었다.

  마흔에서 쉰아홉까지, 19년 동안, 엄마는 서서히 아파왔고, 19년간 엄마의 아픈 모습을 보는 나와 여동생,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늘 슬픔이 있었고, 이 슬픔은, 어느 곳을 가든지, 무얼 하든지 늘 마음속에 공존했다. 그래서, 나와 여동생, 아버지는, 남이 보기에 조금 슬퍼 보였다. 점점 하늘로 이별해야 할 엄마가, 언제 갈까 봐 좀 더 엄마와의 시간을 소중하고, 아낌없이, 깊이 있게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났던 모양도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5년 전쯤, 나의 큰애가 태어났고, 연이어 연년생인 작은애가 태어났다. 두 아이들 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마지막 5년을 함께했다. 엄마는 산부인과까지 와서 갓 태어난 아이를 사진 찍어줄 정도로 당시 활달하셨다. 당시에도 기침소리도 심했지만, 전염력이 없는 지병인지라, 엄마와 두 딸들, 손주들은 함께 간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 손주들을 안겨드리고 싶었는데, 두 아이들이 엄마 돌아가시기 5년 전에라도 태어나줘서 너무 감사했다. 엄마에게 단란한 나의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은 엄마의 생일의 딱 1/2되는 월이었고, 일은 희한하게도 엄마의 생신과 같은 일이었다. 그 월과 일이 의미하는 바도 내게는 의미심장했다. 엄마와 두 딸들의 생일의 날짜가 셋이 똑같은데, 우리 셋이 친자매처럼 가까웠기에, 날짜가 서사하는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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