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우주] 한국 인형극의 역사

개구쟁이 인형극단 | 박경래 박혜경

by 이슬기

처음 부부 인형극단 인터뷰를 계획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팀이 바로 ‘개구쟁이 인형극단’이다. 우리가 나아가고 싶은 인형극단의 형태와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단부터 지금까지 부부가 함께 무대에 오르며, 부부가 극단의 가장 중심이 된다. 또한 인형의 움직임에 가장 집중하는 극단이다.


‘개구쟁이 인형극단’의 대표작 <의좋은 형제>에는 형님이 동생을 위해 쌀자루를 동생 집 앞에 내려놓고 뒤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뒤돌아선 형님의 뒷모습에서 동생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단순한 인형의 움직임에서 느껴진 깊은 감정선! 인형의 움직임으로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 명장면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화창한 가을의 초입, 춘천으로 가는 길은 소풍 가는 길 같아 늘 설렌다. 춘천에는 춘천인형극장과 춘천인형극제가 있기 때문이다. 춘천인형극장 입주단체는 춘천인형극장의 다양한 공간과 자원을 활용해 인형극인들의 창작을 지원하는 사업인데, 현재 ‘개구쟁이 인형극단’, ‘극단 별 비612’, ‘문화예술굼터 뽱’, ‘별별수다’ 네 개의 뛰어난 실력의 인형극단이 입주해 있다. 이들은 1년에 한 작품 이상 발표를 하고, 축제나 체험 프로그램 진행, 국제 교류 등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활발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춘천인형극박물관 2층의 공간(구. 하늘극장)을 네 팀이 구획하여 작업실로 사용한다. ‘개구쟁이 인형극단’의 공간에는 작업을 위한 온갖 재료들이 높은 선반에 차분히 정리되어 있고, 멘토링 사업에 참가하는 멘티들이 만든 인형 머리들이 책상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공간에 ‘개구쟁이 인형극단’의 과거와 현재가 있다.


*일시 : 2025년 9월 22일 (월) 오후 2시

*장소 : 춘천인형극제 입주단체 작업실 (강원도 춘천시)

*참여 : 박경래, 박혜경, 김해일, 이슬기



인형극의 역사와 동료, 그리고 스승님


Q. 두 분이 서울인형극회에서 인형극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어떻게 인형극을 시작하기로 결심하셨는지, 또 두 분의 만남이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졌는지 궁금해요.


박혜경 제가 먼저 서울인형극회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안정의 선생님(당시 서울인형극회 대표)이 선후배 관계를 이야기할 때 ‘혜경이가 선배’라고 정리를 해주세요. 처음부터 공연 단원은 아니었어요. 서울인형극회가 서울 광화문에 있을 때, 그러니까 어린이 대공원 쪽으로 오기 전에는 극단의 행정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사무직으로 한두 달 일을 봐줄 수 있냐고 해서 잠깐 있었죠. 그 당시에는 문혜정 선배님, 김춘수 대표님, 박인수 대표님만 계셨죠. 서울인형극회 들어가기 전에는 인형극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경희궁 복원되기 전에 안정의 선생님의 극장이 거기에 있었어요. 저녁에는 <아가씨와 건달들> 같은 성인극을 공연하고, 낮에는 인형극 공연을 했어요. 제가 일을 하면서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는데, 인형극 무대에서 연습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가슴이 너무 뛰는 거예요.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면 ‘그래, 이렇게 재밌는 게 있구나’ 정도였는데, 인형극은 나한테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죠. 그때는 인형극에 대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모를 때지요. 인형극 극장 공연 하신 것으로는 안정의 선생님이 거의 처음이셨으니까. 인형극 무대를 보면서 가슴이 뛰었고, 그게 인생을 바꿨어요.


박경래 연극은 역사가 이미 오래 됐고, 인형극이라는 분야는, 그때 당시에는 몇몇 팀만 하는 완전히 생소한 예술이었어요. 나 같은 경우는, 사춘기 오듯이 현실 탈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좀 늦게 왔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을 들어갔는데, 경제적인 여건이 따라주질 않으니 2학년 1학기에 휴학하고 군대를 갔지요. 3년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집안 형편은 뻔하니까 등록금에 대한 부담이 됐어요. 공부는 나중에 하자, 하고 자퇴 원서를 내버렸지요. 한 2년간은 공단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어디 배워서 할 것 없나 다녀보기도 하고, 직장에 취직해서 일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우연히 인형극 단원 모집 공고를 보게 된 거예요. 그걸 보기 전에는 내가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남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려우니, 혼자서 일하며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면 어떨까 고민했어요. 목수나 도자기 쪽을 해보면 어떨까 고민하던 차에 (박혜경 목수를 했어야 해.) 그 모집 공고를 본 거예요. 전화번호가 있길래 전화를 했더니, 어른이 아니라 무슨 꼬마가 받아. 그 꼬마가 “엄마 아빠 공연 나갔어요” 그래. 꼬마 데리고 뭐하나 싶어서 전화를 끊고 또 그렇게 살다가, 1년 쯤 지나 또 모집 공고를 보고, 다시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는 어린이 대공원으로 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전화 받은 아이가 안정의 선생님 따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러니까 한 해 사이에 두 번이나 연락을 시도해 들어가게 된 거죠. 제가 들어간 그 해에 춘천인형극제 1회가 시작이 됐어요. 9월에 극단에 들어갔는데, 이제 들어간 지 일주일 됐는데, 춘천에 가서 축제 데코레이션을 하라는 거야. 10월이 축제니까, 들어가자마자 이은성이라는 친구랑 둘이 춘천 어린이회관에 갔죠. 그때 강준택 선생님이 어린이회관 관장님으로 계셨던 때야. 거기서 일주일 동안 꾸미라는데, 뭘 해야 해? 숙직실에서 먹고 자면서 일주일 내내 어린이회관 전체를 다 꾸민 거지. 그렇게 제 인형극 인생이 시작된 거죠.



Q. 춘천인형극제 1회부터 함께하시면서 만들어진 그 감성이 지금의 정선인형극제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박경래 물론 지금은 각자 얼굴 보기도 힘들고 그렇지만, 지금도 인형극인들끼리 만나면 그때 추억들을 아직도 못 잊어. 그때 어린이회관 보면 강 쪽으로 둑이 하나 있고 둑 밑으로 커다란 공터가 하나 있었거든. 거기서 밥 해 먹고요, 첫 해에는 전시실 바닥에 뭘 깔고 잤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 불편하니까, 2회 때는 야전침대를 빌려다가 쓰게 된 거지. 어린이회관에 미군 야전침대를 쫙 깔아놓고, 참석한 사람들 다 거기서 잔 거예요. 서울인형극제 할 때는 외국인이고 한국인이고 상관없이 한군데 몰아놓고 먹고 잤거든. 그때는 숙박 지원이 없어서, 광화문에서 안정의 선생님이 살고 계실 때 그 집에 가서 방마다, 복도에서, 화장실 앞에서 다 칼잠 자는 거야. 그런데 그때 왔던 외국인들도, 그 기억을 못 잊는 거야. 돌이켜 보면 참 불편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재밌었다는 거야. 서울인형극회는 13회를 하고 멈췄는데, 그 이후에 정선인형극제를 할 때도 그 시스템을 가지고 해보자, 먹고 자는 것을 한군데에서 해보자, 그래야 서로 친밀감도 생기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지. 정선인형극제도 교류가 첫 번째 목적인지라 그렇게 하고 있는 거죠. 다 같이 지내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런데 지나고 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참석했던 사람들은 아니까. 힘들어도 그렇게 하자, 교류 목적으로 하면서 이어가는 거죠. 그 전에 부부 인형극제를 제주도에서 하자는 계획도 있었는데, 그게 무산이 된 거야. 그러면 우리가 그걸 정선에서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지. 그런데 그때는 부부 인형극단이 몇 없어서, 듀오 인형극제를 해보자. 무대에 서는 배우는 남자든 여자든 두 명, 조명, 음향 스태프까지 해서 네 명까지만 오고, 아이가 있는 집이면 아이도 데려와서 지내고. 그렇게 해서 춘수 씨 아들, 문 대표 딸, 우리 아이, 이렇게 또래끼리 모여서 거기서 놀면서, 그렇게 컸거든.


박혜경 축제 준비하려면 관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하잖아. 그게 1년 동안 먼지 쌓였으니까, 그거 다 꺼내서 수도에서 물 받아와서 닦고. 아이들이 그런 걸 했다니까. 엄마 허락이 있으면 친구들도 데려와도 되고. 그러다가 듀오라는 건, 한계가 있잖아. 팀원들이 더 많은 극단도 있고, 커다란 작품들은 올 수가 없으니까. 그 후로 인형극을 중심으로 하는 팀들을 오게 하자고 방침이 조금씩 바뀌었고, 그런 팀들은 초청할 때는 특별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리플렛에 홍보하고. 그렇게 다 같이 어울리고 했죠. 지금은 영역이 더 확장됐고.



Q. 두 분이 정선인형극제의 중심을 잡아주시는 것이 오랫동안 인형극을 해 오신 것에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요. 한국 인형극 역사의 산 증인들이시죠.


박혜경 안정의 선생님은 여전히 인형극을 연구하시고 만들고 계시고, 지금도 작업실로 출근을 하세요. 우리가 지금 가도 깜짝깜짝 놀라거든. 그런 모습을 은연중에 보고 배우게 되는 거지. 서로 보고 배우고,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발전하고, 이런 관계들이 그런 것 같아. 저 연세까지 계속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우리의 롤모델이기도 하시고, 또 선생님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이렇게 커서 당신이 못하는 부분들을 받쳐 준다고 생각하시기도 하고. 이렇게 서로 디딤돌이기도 하죠. 물론 이제는 선생님 뵈러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끈끈하게 인형극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런 관계죠. 지금에까지 오니까 그래요.


박경래 이제는 선배들이 다 없어져가지고. 어느새 우리가 나이가 제일 많아진 거야.(웃음) 이제 내 위에 있던 분들은 공연하시는 분들도 없을 뿐더러, 돌아가시기도 하고, 손을 놓으시기도 하고.



Q. 그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극단에서 함께 일하시면서 결혼까지 이어지신 거네요?


박경래 뚜껑이가 우리를 이어주려고 계속 노력을 했어. 뚜껑이는 누구냐면, 김종문. '솥뚜껑 인형극단'. 지금은 아예 다른 일을 하지. 너무 재주가 많은 친구인데. '개구쟁이 인형극단'으로 독립하고 나서는 우리가 너무 밑천이 없으니까, 셋이서 일 년을 같이 일했어. 1년 동안 같이 하면서 돈을 벌면 장비를 두 개씩 샀어. 조명 기기도, 음향 기기도.


박혜경 그때 인형극 제작을 우리 신혼 방에서 같이 했어. 시어머니 집에 얹혀 살 때, 안방을 주셔서 썼거든. 그 안방에서 작업했어. 첫 번째 작품이 그렇게 나온 거예요. 지금은 인형극박물관에 다 가 있지만. 뚜껑이가 우리를 연결을 해주려고 애썼는데, 우리끼리는 몰래 연애를 했었지. 그래서 안정의 선생님이 맨날 그러시잖아. 공연하라고 지방 보내놓으니까 연애질 하다가 만났다고. 그런데 사실 둘이 공연한 적은 많지는 않아. 그때 인형극 버스 극장이 두 대 있어서,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순회공연 가고,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순회공연을 갔거든.


박경래 난 중부 남쪽 지역으로만 3년을 버스를 탔어. 모든 도시를 한 두세 번 순회한 것 같아. 그 당시에는 지방으로 인형극 버스가 내려가면 사람들이 버스를 둘러쌌어요.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했지.


어려운 시간을 버텨내는 방법 : 계속 만들기


Q. 인형극을 후회하신 적은 없으세요?


박경래 있지. 없다면 거짓말이지. 극단 생활할 때는 한두 번 정도 있었어. 월급이 너무 적으니까. 이미 스물여덟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하기도 했고, 집에서도 장남이니까. 솔직히 집에서는, 내가 40대 중반일 때도 인형극 하는 걸 반대했어. 그러니 그때는 돈도 못 벌어오니 결혼도 못하겠다 싶어서 반대를 심하게 하셨지. 독립하고 나서는 큰일들이 있었지. IMF, SARS... 장기간 공연이 없을 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직장을 다니자니 인형극을 아예 놓아야 할 것 같고. 이런 거 터질 때마다 참 힘들었지. 그런 것 때문에 빚이 쌓이지. 그게 좀 풀려야 하는데, 어디 쉽게 풀리나? 쉽게 풀리지가 않잖아. 그때 솔직히 말해서 이걸 왜 선택했나 후회했어. 경제적인 게 너무 불규칙하니까.


박혜경 인형극을 후회한다는 건 아닌데... 우리는 전업 예술인으로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은 예술이 아닌가?” 집에서 꽃을 예쁘게 가꾸고, 설거지를 하고, 이런 것들도 나름대로의 예술적인 모습일 수 있는 거잖아. 각자의 예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히려 그럴 때 더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조금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는, 저는 만들면서 버텼어요. 인형극을 만들면서, ‘다음에 이걸 할 수 있어’, ‘이 시간에 이걸 하자’ 하면서. 지난 작품을 새로 만들거나, 신작을 하거나 아무튼 무언가를 계속 만들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없었으니까. 지금까지 해온 게 이거니까. 그리고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이거니까. 그 장면이 아직까지도 선명해. SARS가 와서 모든 공연이 취소됐을 때, 그때 음악을 들으면서 인형을 만들었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슬픈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작업하기에 좋았어요. 코로나 때도 신작 두 작품 했고, SARS 때도 신작을 했고. 나한테는 돌파구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어.


박경래 우리가 남양주에서 오래 살다가, 강원도 홍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이사하고 나니까 공연이 없네? 수도권 쪽 공연이 다 떨어져 나가는 거야. 한동안 공연이 너무 없어서, 직장 생활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지역을 돌아다녔어. 이력서 가지고 가서 사장이랑 면담을 하는데 내 이력서를 보더니, “경력이 이러신데 여기 와서 일하실 수 있겠어요?” 하는 거야. 거기가 누룽지 만드는 공장이었거든. 예술 쪽 경력만 화려하게 적혀 있으니 그 사장이 보기에 얼마나 황당하겠어. 나중에는 괜히 이렇게 적었나 싶더라고.(웃음) 그러고는 포기하고 있는데, 조금씩 공연이 들어와서 하게 되고, 그러다가 춘천인형극제에서 입주 단체 모집이 떠서 두 말 않고 지원을 했거든.


박혜경 입주 단체 조건이 ‘매년 신작 한 작품’이었어요. 우리는 그동안 작품을 만들어도 영업이 안 되니까, 새 작품을 아예 안 만들게 되더라고. 입주 단체에 들어가려면 일 년에 한 작품을 해야 한다는데, 이게 겁이 나는 거야. 그럴 때 내가 “우리는 지금 막다른 골목이다. 무조건 해야 한다” 해서 한 거지.


박경래 그래도 신작에 대한 제한이 크게 없었고, 그래서 어떤 작품이든 해볼 수 있어서 참 좋았지. 사실 공연만 아니더라도, 인형극과 관련된 무언가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고 온 거였지. 여기서 하다보니까 일도 많이 늘어나고. 살다보면 공연이 아예 없는 상황이 있는데, 겉으로는 티를 안내도, 속으로는 엄청 애가 탔어요. 그렇게 안 되다가 어느 순간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구멍이 열리더라고요.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구나. 앞날이 깜깜한데, 어느 순간 돌파구가 하나 생긴다든가. 큰 돈 벌게 되는 건 아닌데, 이 일 자체가 경제적으로 쌓아놓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 기회가 왔을 때, 갈 수가 없죠. 잡지를 못하죠. 우리 같은 경우에는 그동안 야외 작품이 없고 실내용 공연 위주로만 만들었는데, 야외 축제에서 요청이 들어와도 가지를 못하는 거야. 이번에 야외 작품을 만들어서 잘 다녔지. <여우와 두루미>가 그렇고, <뼈다귀 도둑과 여우 탐정>도 야외 공연 염두에 두고 만든 거예요.



Q. 개구쟁이 인형극단은 인형 움직임에 가장 중점을 두는 극단이잖아요. 그것이 극에서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박혜경 일본의 다케노코 할아버지가 축제에 와서 막대 인형으로 공연을 하는데, 다리가 걷는 거야, 다리가 걸어. 질문할 시간이 있어서 어떻게 걷느냐고 물어봤어. 막대인형을 혼자 조종하고 있고, 다리를 조종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랬더니 “그건 네가 그렇게 봐서 그런 거야. 당신이 인형극에 빠져서 그렇게 보인거야.”라고 대답을 해주셨어. 그런 지점이 인형극의 매력이라는 거야. 나한테는 구현하고 싶었던 인형의 이상이 있었어요. 바로 그 막대인형의 걸음걸이였어요. 다른 요소들이 들어와도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지지가 않더라고요. 우리가 처음 독립했을 때부터 그걸 생각했어요.


박경래 이제 우리나라에서 막대인형을 하는 팀이 거의 없다 보니까, 극단 자체적으로 워크숍을 열고 교육을 하고 있지.


박혜경 이것을 ‘순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입주단체로 있으면서 극장에서 혜택을 받고 있으니, 우리의 재능으로 어떻게든 무언가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고 있는 거죠. 늘 하고 싶었지만 장소가 없어서 못했던 것을 늦게나마 입주 단체 공간이 생겨서 하게 된 거죠.


박경래 요즘에는 ‘융복합’이라며 인형극에도 여러 요소들을 섞어서 하는데, 그 질감이 다른 것 같아요. 영상과 인형이 같이 가는 게 쉽지가 않아. 그리고 인형 조종자와 배우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인형 조종자는 연기자가 아니잖아요. 어떻게든 인형을 잘 움직여서, 감정이 인형에 실리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면서 관객이 인형을 통해서 느끼게 해야 감동을 받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왜 인형을 가지고 하지?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에요. 어떤 후배가 얼마 전에 질문을 하길래 이렇게 대답해줬어. 어떤 오브제를 갖다 놓고 그것을 보게 하고 싶으면, 인형 조종자가 되어야 돼. 그래야 관객이 물건을 보게 되니까. 아니면 그냥 물체를 갖다 놓은 거잖아. 인형이든 조종자든 시선이 가장 중요해. 이 물건을 보고 감동을 받게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박혜경 이런 지점이 지당한 말씀이에요. 그런데 이것도 교육을 받으면 다 개선이 되어요.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던 거죠. 교육 아카데미가 이래서 중요해요. 시선이 정말 중요한데, 시선은 잠깐 사이에 흐트러질 수 있어요. 인형극을 오래한 사람들도 잠깐이면 시선을 놓쳐요. 우리도 어느 순간에 자꾸 놓치고 그래요.




안 쳐다봐도 저기 있겠거니, 하는 그런 사이


Q. 부부 인형극단으로서 좋은 점과 어려운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박혜경 같이 인형극을 하다 보니까 서로를 너무 잘 알잖아요. 어떤 점들은 남들은 칭찬하는 부분이지만 나한테는 부족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서 정말 심각하게 싸운 적이 있었거든. 그때 서로 인형극단에 대해서 부담감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합의점이 안 나오는 거야. 그래서 극단을 새로 내서 나갔어. 박경래 인형극장. 그게 치열한 싸움의 산물이었어. 그래서 주변에서 “싸웠으면 이혼을 하지 무슨 작품이 나왔어”하면서 놀렸지.(웃음)


박경래 장점은 너무 많지. 싸웠지만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풀리기도 하고, 안 봐도 서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많지. 큰 극단에 있을 때 단원이 바뀌는 것을 수없이 겪었다 보니 공연에 있어서는 멤버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인 것 같아. '개구쟁이 인형극단'은 우리가 서로 평생하자고 만든 거니까.


박혜경 저한테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아이가 조금 컸을 때예요. 어둑어둑한 저녁에 다른 아이들은 다 집으로 갔는데, 우리 아들만 집 앞 낮은 턱에서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박경래 아이가 다섯 살 때까지는 할머니가 키워주셨어.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거든. 그때는 우리가 젊었으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극장에 가서 세팅을 했어.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니까 아무리 이른 새벽이라도 공연 가야지, 하면 그 어린 녀석이 벌떡 일어나. 혼자 있기가 싫었나 봐. 우리 인형 들어가는 박스 안에서 자고 있고 그랬지.(웃음) 포장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없을 때 둘 다 없는 게 힘들기는 하지.


박혜경 나는 이런 일을 해서 이렇게 살 수 있어. 그런데 부모 형제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이 평생 고통이었어요. 그래도 어쨌든 그런 굴곡을 무수히 지나왔고, 지금은 서로 안 쳐다봐도 저기 있겠거니, 하지.(웃음)


박경래 이렇게 세대가 바뀌는 데도 버티는 게 신기하다니까.



개구쟁이 인형극단


1994년에 창단했다.

막대 인형과 손 인형극을 전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워크숍을 열어 인형의 제작 및 조종법을 알리고 있다.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인형의 움직임으로 인형극 예술의 매력을 전달하고자 한다.

블로그 ggji94.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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