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사이에서 발견한 행복한 날의 허술한 기록]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기억에서 멀어져 이름만 익숙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책을 휘리릭 넘기다 무심하게 툭 펼쳤는데 우연찮게 p78 부석사 무량수전. 아무래도 사놓고 제목이 가리키는 그 페이지를 여러 번 봤지 싶다. 부석사로 출발하기 전, 책장 한 구석에 꽂힌 책을 다시 부랴부랴 훑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답했다.
–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中
경상도라서 멀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파란 운동화에 빨간 끈 동여 메고 호기롭게 당일치기를 출발하며 생각했다. 호젓하고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모를지라도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는지는 확인하겠노라고. 지금 이 계절이라면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 가득 찼을 뿐.
직접 배흘림기둥에 서서 가을빛에 취해 빨강 노랑 뽐내는 오색 잎과 그림 같은 능선을 보니 무량수전 네가 호젓한 이유는 너를 품은 소백산 때문인가 싶다. 스스로 화려하게 빛나진 않지만 자연 속에서 어우러져 담담하고 그윽하게 빛을 내주고 있는 기운 꽉 찬 곳. 날이 너무 좋아 촉촉함은 아니었지만 따사로운 햇살에 빨강이 노랑이 초록이를 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좋다. 가을바람 가을 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