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이상한 꿈을 꿨다.
통 왕래가 없고 지금은 영주권을 받아 미국에 살고 있는 선배가 꿈에 나와서 힘들다고 엉엉 우는 꿈.
꿈을 잘 꾸지도 않거니와 꾸더라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출근길 내내 떠올라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그 간의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누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산다는 선배의 말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의 무서움(?)을 느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십수 년 전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과, 혹 지금도 잘난 체하며 누군가에게 같잖은 충고를 하고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짧은 대화 중에도 머리를 스쳤다. (대화 중 스스로를 비춰보고 반성 많이 하는 스타일...)
"내가 힘들다 했을 때, 네가 해줬던 말 아직도 기억하고 살아. 왜 미국에 있냐고 네가 물어서, 미래에 내 가족이 생기면 미국에서 살고 싶어서 미국에 있다고 했더니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으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지금 당장 행복한 걸 찾으라고 했지."
과거에 내가 했던 말이 내게 다시 돌아왔을 때, 또 한 번 놀랐다. 저 말을 입 밖으로 뱉었던 시절의 나는 10년도 훨씬 전의 20대 초반의 나였고, 지금은 30대를 거의 흘려보내 앞자리가 곧 또 바뀔 시점인데 저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저 생각이 강해졌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고 견디며 희생하는 분도 많겠지만, 나는 보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소중한 순간이 오면 따지지 말고 누릴 것.
우리에게 내일이 있으란 보장은 없으니까."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 요나스 요나손 장편소설
예뻐라 하는 후배 녀석과의 저녁 시간이었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연락 주고 따라주는 후배들을 보면 참 감사하다. 돌아보면 선배들에게 예쁨 받는 건 상대적으로 쉬웠다. 몸이 조금 불편하면 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으면 됐다.(그렇다고 내가 군소리 없이 말 잘 듣는 후배는 그때도 지금도 아니다.) 그런데 그 선배의 역할이 내 것이라면 참 어렵다. 내가 가는 길에 후배가 힘을 보태어 준다는 건 내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라고까지 쓰고 이 문단을 다시 읽어보니 잘못된 전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예쁨 받고 싶었고, 따랐던 선배들은 또 선배들만의 멋짐이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을 텐데, 멋모르는 후배의 자만한 생각이었구나 싶었는데 이 기록 역시 지우지 않고 남겨본다. 선배들은 그런 멋진 선배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을 했었겠냐고!!) 각설하고.
"언닌, 참 모든 걸 쉽게 얻는 것 같아요."
오호로? 마치 맨날 놀고 공부도 안 하더니 성적 잘 나오는 모범생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칭찬이었다는 것도 아는데, 그간 내 나름대로 노력했던 과정이 헛수고가 된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였었구나, 근데 나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살아. 계획적이거나 큰 목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루하루 애쓰며 살아."
과거엔 오래 벌어먹을 수 있고 안정적인 삶이라 여겼던 대기업 사노비 생활 1n년차. 이 재벌가 사노비에서 저 재벌가 사노비로 이동하고 있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허울이 날 그렇게 비치게 하는 것일까?
며칠 전 봤던 드라마 대행사(대행사라는 말은 요즘 누가 쓰며, 그룹사에서 본인들 입으로 본인 회사를 대행사라 칭하지 않거늘 이런 제목은 웬 말이냐며 이 드라마 가지고 할 말이 참 많지만 또 보다 보면 공감 가는 포인트들이 있다. 그건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하기로 하고...라고 까지 쓰고 보니 누가보면 나 광고회사 다니는 줄 오해하겠구만.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에서 명예회장으로 보이는 분이 현 회장인 아들에게 하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넌 뭐 하러 월급을 주니? 머리 좋은 놈들 왜 모아 놨어. 싹 다 모아서 방법 찾아내라고 하면 되지. 영호야, 걱정을 한다고 걱정이 사라지니? 회장이 왜 걱정을 하니? 걱정을 하게 만들어야지. 니 걱정 월급 받는 머슴들한테 싹 다 줘버려라." - 드라마 대행사 ep.4
꽤나 현실적인 장면이라 생각했다. 그로 인해 그래도 복지며 인센이며 누군가에게는 분에 넘치는 혜택이라고 할 것들을 받고 있지만, 내 젊음과 생각과 시간을 매일매일 그곳에 온전히 쓰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환경을 빠져나오면 자립하여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생활의 연속. 이렇듯 실상은 항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연말 조직개편 시즌만 되면 빠르면 40대에 집에 보내지는 선배들을 보면서 십수 년 보내온 나와 동료들은 항상 몇 년 뒤 뭐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뿐이랴 스타트업이 대세가 된 시대에 대기업은 이제 안정적이라기보다 도전 의식 없는 사람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매일매일 애쓰며 살아왔고, 아직도 오늘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 생각한 나이거늘 그 만남 이후, 주위 지인들을 보면 꿈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하고 살았다.
"꿈이 있으세요? 꿈이 뭐예요?"
꿈이나 목표 없이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 건 잘못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 찬실이는 복도 많지 | '2020 김초희감독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