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은 지난 긴긴 황금연휴를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여행' 키워드로 브런치 유입이 늘어나는 걸 보며 많이들 떠나는구나- 짐작만 했을 뿐.
나는 희한하게도 휴일에 자주 아프다. 회사일로 바쁠 땐 주중에(때로 주말까지) 아플 시간조차 없어서 그랬다 쳐도, 요즘엔 평일 주말 따로 없이 지내는데도 주말엔 대체로 컨디션이 별로다.
이번 연휴에도 그랬다. 4월 말부터 컨디션이 점점 안 좋아지더니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흉통과 고열에 시달렸다. 4일에 동네 병원을 찾아가 독감 검사를 했더니 결과는 음성. 흉부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은 의무기록과 소견서를 주면서 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이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잖아...
기력이 딸리는 데다 잔뜩 겁을 먹어선 덜덜 떨며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예전에 아빠를 모시고 처음 찾은 응급실에서는 내내 불쾌했다. 아빠가 눈 통증을 호소하는데 들여다보지도, 얘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일단 세척을 강요하는 의료진 때문이었다. 절차가 그런 거라면 일반인인 우리에게, 더욱이 예기치 않은 통증에 잔뜩 겁먹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설명을 해줄 순 없었을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며 아파하는 아빠의 눈에 식염수 한 팩을 들이부어야만 했다. 마냥 기다리게 하지 않고, 얼굴 한 번이라도 보고 갔다면 그렇게까지 불안하고 불쾌하진 않았을 텐데. 응급실이란 곳이 응급한 환자를 우선으로 돌아가는 곳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너무했지 싶었다.
다행히 이번에 내가 만난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은 다 친절했다. 증상과 병력에 대해 관심 있는 태도로 충분히 묻고 듣고(경험 상 '묻기'는 잘 하는데 '듣기'는 못/안 하는 의사들이 너무 많다), 검사 결과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궁금한 걸 물어볼 때마다 잘 대답해주고, 불안과 걱정에 휩싸인 나와 가족들을 안심시켜주었다. 지금 보니 나는 입원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그러니까 아빠보다는 응급환자이기 때문에 더 나은 대우를 받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나의 응급실에서의 첫 하룻밤은 최악에 가까웠다.
물론, 처음엔 좋았다. 죽을병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병원에 오기 전까지 며칠을 집에서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모른다. 이러다 숨이 마구마구 가빠지면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하고. 열이 39도까지 치솟아 아이스팩을 베개 삼아 누워서는 속으로 유서를 쓰고 또 썼다. 검사 결과가 나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어쨌든 진단을 받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거다. 이젠 검사와 치료만이 남았으니까.
오히려 철없이도 조금 신이 났다. 최근 재미나게 본 그레이 아나토미의 세트장에 온 것만 같아서 신기했다. 혈액검사를 위해 피를 왕창 뽑았고, 처음 찍어보는 CT 촬영 때는 조금 멀미가 났지만, 지금까지 중에서는 먼저 병원에서 했던 독감 검사(콧속에 면봉 비슷하게 생긴 걸 깊숙이 넣어서 콧물을 채취. 자동으로 눈물이 나옴)가 제일 힘들고 아픈 절차였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동맥 채혈(주로 손목에서 채혈)과 항생제 거부 반응 검사(팔에 항생제 주사 같은 걸 푹 찔러서 거부 반응이 있는지 확인)를 거치며 웃음을 싹 잃었다. 이후 확 열이 올랐다가 오한이 오고, 다시 땀이 나다가 으슬으슬 추워지기를 반복했다. 살짝 잠들려다가도 계속되는 치료, 투약, 검사, 검사 결과 확인 때문에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밤 10시쯤? 하룻밤 지켜보고 다음날 아침 검사 결과에 따라 입원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때부터 최악의 밤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밤을 꼴딱 새웠는데, 그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응급실에 대한 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응급실엔 프라이버시가 없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정말 모든 얘기가 다 들린다. 아마 그때 같이 누워있었던 사람들 모두 내가 어디가 아픈지, 병력은 어떤지, 보호자로 누가 왔는지 다 들었을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아프다는 비명 소리는 기본, 술 취해 구급차 불러 들어온 미성년자가 살기 힘들다며 엉엉 우는 소리, 여자친구가 수액 맞을 동안 남자친구가 게임하는 소리, 엄마 반찬은 맛없다고 찡얼대는 철부지의 목소리,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도 들린다.
노모에게 오늘 밤은 자기가 아빠 곁을 지킬 테니 걱정 말고 집에서 푹 주무시라고 하는 딸의 목소리도 다 들린다. 내놓았던 된장을 냉장고에 넣어달라는 부탁도. 내 소식에 급히 달려온 우리 엄마도 할아버지가 집에 잘 들어가셨는지, 식사는 잘 챙겨 드셨는지 걱정되어 연신 전화를 했다. 우리네 엄마들, 혹여 당신 없이 가족들이 밥 못 먹을까, 뭘 못 찾을까 여기저기 전화들을 하는데 듣고 있으려니 자꾸 마음이 찡했다.
응급실엔 밤이 없다.
환자는 새벽 두 시에도 들어오고 세시에도 들어온다. 그리고 그 환자들도 나처럼 의료진과 대화를 하고, 치료, 투약, 검사, 검사 결과 확인을 줄줄이 한다. 내내 형광등이 켜져 있고, 내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내내 시끄럽다는 소리다.
달팽이 수면이라는 수면 관리 어플이 있다. 수면 패턴, 잠꼬대, 주변 소음 등을 기록해주는 어플인데,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응급실에서 자려고 시도한 2시간 동안 기록된 잠꼬대가 116건, 환경 소음이 3건이었다. 여기에서 공개할 수만 있다면 올리고 싶을 정도다.
새벽 6시 정도가 되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내내 못 먹고 못 잤으니 엄청 예민할 수밖에. 갑자기 시끌벅적해지는 걸 보아하니 아침조가 교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연휴임에도 활기차게 출근하여 일과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간호사실로 추정되는 방이 내가 있던 방 바로 맞은편이어서 방과 복도를 오가는 간호사들의 대화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는 점이었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들의 침대로 가득한 방 앞을 지날 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줬으면 하는 내 바람이 너무 큰 걸까. 아니면 혹시 필요상 일찍부터 깨우기 위해 일부러 일련의 아침 소동을 벌이는 걸까? 아무튼 같은 이유로 비품을 옮기거나 청소하는 분들의 부주의함에도 짜증이 났다.
응급실 간호사는 극한직업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응급실 담당 간호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거나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간호사와 의사들 사이의 신경전. 그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드라마를 보는(듣는) 듯했다.
예컨대 내 옆옆옆 침대로 추정되는 곳에서 한 환자가 큰 소리로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가 다가가니 그 환자는 '왜 다시 온다더니 한 시간이 되도록 안 오냐'며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 영문을 모르는 간호사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뒤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내용으로 짐작했을 때, 그 의사가 무슨 검사를 하다가 중간에 가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아마도 환자의 옷이 벗겨져있었던 듯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욕을 먹는 것도 간호사, 뒷정리를 하는 것도 간호사, 환자를 달래주는 것도 간호사의 몫이었다. 그때 그 간호사, 잔뜩 화가 나서 욕을 하면서도 환자한테 가서는 잘 설명해주더라. 당연한 일이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환자들이 기다림에 지쳐 재촉하는 대상도 간호사, 아프다고 짜증을 내거나 욕을 하는 대상도 간호사다. 검사나 입원 스케줄이 꼬이거나, 환자나 환자 보호자가 사라져도 실제 잘못한 사람이 누군지에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다 간호사(=환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병원 측) 탓이 되더라. 그런 몇몇 억울한(?) 상황을 보고 나니 사람들이 자신이 병원에서 잘 대우받기를 원하는 만큼 의료진, 특히 간호사에게(의사한테는 대체로 다 잘 보이려고 하니까) 잘 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에 찾아온 의사 선생님이 외래 진료를 잡아주며 귀가를 허락했다. 올레! 남은 수액을 다 맞자마자 잽싸게 짐을 챙겨 불편했던 응급실 침대와 이별했다.
그리고 야간 약국에서 약 타고, 수납까지 하고 난 후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응급실은 비싸다, 엄청!!!
이번 응급실 방문은 마치 시트콤의 한 에피소드처럼 희로애락이 가득했다. 긴장감 넘쳤고, 웃펐다. 우선 큰 병이 아니어서 정말정말 다행이었고, 덕분에(?) 비싼 돈 내고, 참으로 불편하게 응급실 구경도 했다. 다음에 또 가게 되면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다시는 갈 일이 없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겁 많고 걱정 많은 내가 다 낫게 도와주신 모든 병원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걱정해주고 병수발 들어준 사랑하는 가족한테도! 우리 모두 다음 연휴엔 병원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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