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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ul 02. 2022

안심의 순간



  일진이 사나운 날들이 있다.  




  난 '일진이 사납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최근 일주일은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들이었다.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 순간은, 가게에 출근해 문을 열고 한 발 내딛었을 때 '첨벙'하는 소리와 느낌의 순간이었다. 카페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원인도 모른 채 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걸레로 닦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물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한 손님이 들어오셨고, 지금 영업이 안될 것 같다는 나의 말에 손님은 아직 영업시간 전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들어와서 기다리겠다고 하셨다가 내가 안된다고 하자 물난리 난 상황을 확인하시고 화들짝 놀라 하시며 나가셨다. 나는 그렇게 손님을 내쫓은 채 물을 치웠다. 빗자루로 물을 쓸어 담고 물통을 들어 나르고 빗자루로 다시 물을 쓸고 물통을 비우고, 또 비우고, 걸레로 닦고 걸레를 빨고 다시 바닥을 닦고 다시 걸레를 빨고... 더웠고 힘들었다. 이제 좀 어느 정도 치웠다 싶으니 손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드디어 첫 번째 커피를 팔았고 더웠고 힘들었다. 


  이 물난리가 왜 났는지를 알아야 했다. 전날 밤 비가 많이 왔는데 물이 밖에서 들어온 것 같지는 않았고, 빗물이 갑자기 고이면서 배수관이 넘친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했다.  


  그날 점심, 또 한 번 물난리가 났다. 바 앞에서 물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분명해졌다. 배수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쪽 배수라인으로 연결되는 건 제빙기와 커피머신이었는데, 제빙기가 운동을 시작하면서 배수가 넘쳐 물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그 시간은 알바생이 있는 시간이라 알바생에게 흘러나오는 물을 치워달라고 해놓은 후, 나는 본격적으로 원인 분석에 들어갔다. 바 안에 있는 테이블 냉장고를 들어내 바깥으로 빼고 그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 물이 넘치고 있는 현장을 확인했다. 배수관이 막혀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커피 찌꺼기 때문일 것이다. 급히 다른 통을 가져다가 제빙기와 커피머신의 배수라인을 밖으로 빼내고 더 이상 물이 넘치지는 않도록 했다. 


  이제 문제는 막힌 배수관을 뚫는 것이었다. 남편이 배수관 뚫는 기계를 주문해주었다. 다음날 새벽 배송으로 올 거라고 했다. 아무튼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알바생은 카페 바닥의 물을 치우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테이블 냉장고는 밖으로 나와있고, 그 와중에 커피를 달라는 손님에게 커피를 주었다. 그렇게 저녁까지 커피를 팔았다. 다행인지, 손님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비장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배수관 뚫는 기계가 새벽 배송으로 문 앞에 도착해있었다.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가게 문을 여는데 또 한 번 '첨벙' 했다. 따로 빼놓은 제빙기 배수라인의 물이 넘쳤던 것이다. 나는 큰 숨 한번 몰아쉬고 박스를 내려놓고 에어컨을 틀고 음악도 크게 틀어놓고 빗자루로 다시 또 물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오는 손님을 또 내쫓았다. 그렇게 또 한 시간. 더웠고 힘들었다. 


  배송받은 기계는 훌륭했다. 역시 장비가 있어야 해. 배수관이 뚫렸다. 물을 콸콸 들이부어도 물이 꼬르륵꼬르륵하며 잘 빠져나갔다. 제빙기와 커피머신의 배수라인을 다시 배수관에 꼽고 구정물로 시커먼 손을 닦았다. 냄새가 나서 두 번 더 닦았다. 끙끙대며 테이블 냉장고도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걸레질도 하고 마지막 뒷정리를 하고 가게문을 열었다. 손님이 오셨고 커피를 팔았다. 커피머신은 멀쩡했고 제빙기도 원활하게 작동을 시작했다. 괜찮다. 다 해결되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신발 밑창이 떨어졌다. 덜렁덜렁 떨어졌다. 다행히 가게에 여분의 신발이 있다. 떨어진 건 당장 내다 버리고 다른 걸 신으면 된다. 괜찮다. 


  샌드위치를 주문한 손님에게 샌드위치를 서빙하는 도중에 샌드위치 한 조각이 데구루루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새로운 샌드위치를 다시 만들어드리겠다고 하고,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급히 샌드위치를 다시 만들었다. 


  비가 계속 온다.  




  손목이 아프다. 여름이라 아이스크림이 들어간 메뉴가 많이 나간다. 이 말은 아이스크림을 풀 일이 많다는 말이다. 아이스크림을 풀 때마다 한 번씩 손목에 찌릿함을 느낀다. 3번의 물난리를 겪는 동안 빗자루질을 하고 걸레를 짜느라 손목을 또 많이 썼다. 


  날파리가 날아다닌다. 음식물쓰레기는 하루만 지나도 냄새가 난다.




  퇴근하려고 보니 이중 주차된 차가 내 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요 근래 이런 일이 너무 빈번하다. 끙끙대며 차를 밀어내야 퇴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날은 차가 밀리지 않았다. 전화를 했더니 한 아주머니가 "뭐라고요?"만 반복하신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차 빼 달라는 말을 간신히 하고 차 안에 들어와 앉아있는데 온 몸에 힘이 빠진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아주머니가 나타나셨고 차를 빼주셨다. 괜찮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  




  다음날 아침에는 카페 외벽에 붙어있는 벽돌이 떨어져 있었다. 산산조각 난 벽돌이 테라스에 널려 있었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 벽돌을 쓸어 담았다. 무거웠고 더웠고 힘들었다. 손목이 지끈거렸다. 


  유리창으로 떨어지지 않은걸 다행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유리까지 깨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떨어진 벽돌만 치우면 되는 거니까 다행이지. 그래, 다행인 거다. 다행인 거다. 


  비가 계속 온다. 습하고 축축한 날들이다. 점심때 몰려들어야 할 손님들은 몰려들지 않는다. 




  배가 아프다. 오른쪽 아랫배다. 맹장수술은 고등학교 때 했으니 맹장염은 아니다. 찾아보니 자궁근종, 자궁내막증, 신우신염, 골반염, 담낭염, 난소암 같은 게 원인일 수 있다고 한다. 빨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게 좋다고 했다. 계속 더 찾아보니 배란통일 수도 있다고, 배란통이라면 조금 이러다 만다고 그래서 일단 좀 견뎌보기로 했다. 괜찮을 것이다.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아침이 두렵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지려나. 






작은 기쁨, 이해인


  내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나는 오늘 작은 기쁨을 불렀나. 나에겐 어떤 작은 기쁨이 있었나. 행복의 순간은 어떤 순간이었나. 세상에. 행복한 순간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벽돌이 떨어져 깨져있었고, 날파리가 날아다녔고, 비가 엄청 계속 내렸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렸고, 제빙기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활동을 시작하면 불안함에 바 앞으로 후다닥 달려 나가 혹시 물이 새는지를 살폈고, 우울했고 힘들었고 배가 아팠고 손목이 아팠다. '괜찮다', '다행이다' 하며 나를 다독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난 힘들었다. 


  그래도 소소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분명 있었는데, 그 순간들조차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비 구경을 하며 감상에 젖지도 않았고, "커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도 즐겁지 않았다.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보람되지 않았고, 매일 오는 손님을 만나도 반갑지 않았다. 출근길은 두려웠고 퇴근길은 적막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밥을 먹는 건 자동차에 기름을 주유하는 일 같았다. 맛있는걸 즐겁게 먹는 게 아니라, 배고프니까 먹긴 먹어야 해서 먹는, 그래야 다음을 또 살아가니까 먹는, 그런 것 같았다. 영양제를 먹는 게 그래서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맛있게 먹지 않아도 되는 영양제. 그저 삼키기만 하면 나에게 곧바로 힘을 주는 영양제. 


  나는 날씨 탓을 했다. 이 모든 건 다 날씨 때문이야. 날씨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그래. 날씨가 이래서 물난리도 났었던 거고, 신발도 그렇게 된 거고 벽돌도 떨어진 거야. 날씨가 이러니까 손님도 없지. 그래, 이건 다 날씨 때문이야. 


  아픈 배 위에 찜질팩을 올려놓고 앉아있자니 눈물이 다 났다. 날씨 탓이나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별로여서. 축 처져있는 내 모습이 너무 짜증 나고 서러워서.  




  자려고 하니 남편이 푹 자라고 했다. 사랑한다고 하자 남편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게 좋았다. 그런 표현을 망설임 없이 하는 사람이다. 그의 이런 한 마디에 녹는다. 그가 내 손을 잡자 나의 힘듬과 서러움이 날아간다. 하루 종일 눈을 씻고 찾아도 기쁨의 순간, 행복의 순간이 하나도 없었는데, 드디어 찾았다. 그래, 이 순간이다. 나의 유일한 행복. 나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다. 안심이 된다. 


  뒤에 웅크려 있던 고양이가 야옹거린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자 또 야옹거린다. "귀엽누"하고 고양이를 쓰담 쓰담한다. 고양이를 보며 웃는 나의 모습이 맘에 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이 나의 인스타그램에 댓글을 달아놓았다. 



  이 하나의 빛이 큰 빛이 되어 내 내면을 밝힌다. 

  안심이 된다. 행복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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