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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Aug 23. 2020

나의 고마운 밥처럼



  타는 듯 갈망할 때가 있었다. 


  간절하게 떡이 먹고 싶었다. 외국 생활을 하는 동안. 어쩜 그렇게도 떡이 먹고 싶던지. 


  빵은 어디에서나 살 수 있었지만, 떡은 한인마트에서만 살 수 있었다. 옛날에 비하면 한인마트는 꽤 흔해져서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걸어갈 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처럼 쉬는 날 오직 마트를 가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해야 했고, 차량을 섭외해야 했다. 그렇게 마트를 갔는데 떡이 없으면 좌절했다. 


  한인마트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떡을 팔았다. 아마도 떡은 수요가 적고, 쉽게 상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요일을 정해놓고 팔 수는 있었을 것 같은데, 마트에서는 무슨 깜짝 이벤트를 하듯이 떡을 팔았다.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밀당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마치 운명처럼 떡을 만나는 날이 있었다. 때마침 내가 장을 보러 갔는데 매대에 떡이 진열되어 있는 날. 그런 날은 떡을 만나는 그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흘렀다. 

  하지만 그렇게 떡을 만나더라도 떡의 수량과 종류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블루베리 설기, 앙꼬 절편, 치즈떡 같은 온갖 화려한 떡이 있지만, 그곳에서 그런 떡을 감히 바랄 수는 없었다. 그곳에서 살 수 있는 떡은 가래떡, 절편, 인절미와 같은 아주 대표적인 떡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 모든 떡에 대해 감지덕지했다. 


  나는 마트에 있는 떡을 종류별로 여러 개 사 와서 실컷 먹고 다음날 또 실컷 먹었다. 다 먹고 나면 또 다음 떡을 만날 때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나는 여전히 갈망했다. 맘껏 떡을 먹고 싶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떡에 대한 갈망이 치솟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떡만 먹으리.' '모든 떡을 다 먹으리.' 


  그러다가 드디어 한국에 돌아와 떡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게 되자, 나는 한을 풀듯이 온갖 떡을 다 사 먹기 시작했다. 외국생활에서는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하고 예쁜 수많은 떡들. 



  그런데 놀랍게도, 떡이 별로 맛이 없었다. 분명 오늘 나온 따끈따끈한 떡인데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유명한 떡집을 여러 군데 돌았는데도 그랬으니 떡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본다. 문제는 나의 갈망, 그 자체였다. 어쩌면 나는 떡을 갈망했다기보다는 나의 갈망을 갈망했던 것 같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떡을 잘 안 먹게 되었다. 냉동실에는 안 먹고 넣어둔 떡이 점점 쌓여갔다. 


  몇 달 후 냉장고 정리를 하는 날, 나는 그 떡을 모두 버렸다.  




  떡 같은 사람이 있다. 어쩌다 한 번 아주 큰 즐거움과 기쁨을 주면서 나를 갈망하게 하는 사람.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떡 같은 사람이 좋았다. 그와의 만남만을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나의 모든 시간은 그를 향한 시간이었다. 일주일 중 1일이 만남의 시간이라면, 나머지 6일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나머지 6일 동안 나는 분명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며 나의 스케줄을 다 소화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시간으로 사는 듯 살았다. 시험 결과가 좋아도, 일의 성과가 훌륭해도 나는 그다지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6일은 오직 단 하루, 그와의 만남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길었고 만남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만남의 시간은 6일 동안 쌓인 공허함을 달래지 못했다. 나는 끝없이 갈망했다. 이런 만남은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끊을 수 없었다. 그 갈망은 사실 아주 괴롭고 힘들었을 텐데도 나는 (적어도 그 당시에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런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의 일주일은 원래의 나의 일주일이 되었다. 텅 빈 것처럼 지나갔던 나의 6일은 하루하루 꾹꾹 눌러 채워진 6일이 되었다. 더 이상 '나머지 6일'이 아닌, 일주일 중 6일, 그러니까 나의 충실한 6일로 되돌아온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원래의 나로 돌아왔다. 


  떡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사람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나의 갈망, 그 자체였다.




  요즘 갑자기 든 생각인데, 어쩌면 이 갈망은 관계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에 따라 나의 모습이 달라지곤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주로 나올 때가 있고, 내가 별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많이 나올 때가 있다. 몰랐던 나의 모습이 나올 때는 흠칫 놀란다. 그건 아마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를 만나 적극적이고 쾌활해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세심해지고 조심스러워지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관계의 이러한 특수성이 서로의 새로움을 이끌어내며, 마치 '떡'과 같은 한정된 즐거움과 기쁨을 준다. 이 섬광 같은 새로움이 나를 애타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갈망하고 갈망했던 것이다.  




  밥은 떡과는 다르다. 떡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떡인지, 언제 만나는지에 따라 나의 감정과 태도가 그렇게도 달라지는데, 밥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밥은 놀라운 새로움을 주지도 않고, 한정된 즐거움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왠지 밥은 그냥 밥이다. 

  잡곡밥, 찰밥 등 여러 종류의 밥이 있고, 또 반찬에 따라 여러 조합이 가능해서 얼마든지 버라이어티한 재미로 다가올 만도 한데, 밥은 이상하게도 그저 밥이다. 나는 밥 앞에서 들뜨지 않는다. 밥 먹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애끓지도 않는다. 밥 앞에서 나는 그저 '나'로 존재하고, 밥 또한 내 앞에서 그저 '밥'으로 존재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살아간다고들 하지만, 사실 나는 풀과 고기만으로도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 집 밥솥이 밥을 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아예 전기코드를 빼놓았다. 곰곰이 따져보니 나는 2주에 한 끼 정도 밥을 먹는 것 같다. (최근에는 탄수화물을 자제하려고 하다 보니 더 그렇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밥은 너무너무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다. 비 오는 날의 파전처럼 갑자기 불현듯 생각나는 음식도 아니고, 애타게 갈망하며 기다리다가 먹는 음식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밥이 '부재(不在)'한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쌀 한 톨 먹지 않고 지내는 날이 훨씬 많음에도, 그래도 밥은 '늘 먹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어쩌다 한 번 먹는 밥은 늘 먹었던 것 마냥 아무렇지도 않다. 밥은 늘 그냥 밥이다. 


  이 밥은 사실 아주 오래전에도 먹었던 그 밥이다. 아주 옛날부터 밥은 늘 내 곁에 존재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 또한 성장하면서 많은 것들이 변화했음에도 나에게 밥은 계속 그 모습 그대로다. 내가 먹든 안 먹든, 아무튼 밥은 일상이었다. 내가 갈망하지 않아도 밥은 늘 거기에 있었다.  





  밥 같은 사람이 있다. 나와의 관계에서, 늘 같은 사람.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그저 '나'로 존재할 수 있고, 그 사람 또한 내 앞에서 그저 '그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그 사람을 떠올리면 늘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실제로 만나도 그 이미지 그대로 존재하는 그런 사람. 어떤 시대에도, 어떤 상황에도 늘 같은 사람. 어쩌면 조금 고지식할 수도 있고, 때로는 답답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한결같은 사람. 그런 사람과는 굳이 새롭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고,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런 사람은 어제 보고 오늘 또 봐도 똑같고, 몇 년 만에 만나도 똑같다. 이 관계에서는 나는 그토록 애타게 갈망하지 않는다. 물론 만남의 시간은 즐겁지만, 그 이외의 시간을 '나머지 6일'로 지나쳐 보내지 않는다. 나는 충분히 나의 시간을 보람되게 보낸다. 그러다가 드디어 만남의 시간이 되면, 그 또한 '나의 시간'이 된다.  






  집에 혼자 있는 강아지가 외로울 것 같아서 다른 강아지를 한 마리 더 데려다가 집에 두면,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며 알콩달콩 지내는 게 아니라, 외로운 강아지가 한 마리 더 생길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아빠와 '외로움'에 대해 대화한 적이 있었다. 대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왜 외로운 것일까. 외로움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외롭지 않기 위해서 뭘 해야 할까. 그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외로움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였다. 

  주위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외로울 수 있다는 것. 외로워서 누군가를 만난다면 함께 외로워질 수 있다는 것. 본질적으로 외로움이라는 건 혼자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또한 잘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 

 

  외로움이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면, 보다 근본적인 내면의 것으로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외롭다는 것은 '심심하다', '지루하다'와 맥을 같이 한다. 즉, 따분한 것이다. 따분하니까 새로운 것을 찾고, 그 새로운 것들이 나의 삶을 휘저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유독 인생이 따분한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똑같은 일을 해도 조금 더 활기차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못해 겨우겨우 일을 하고, 똑같은 모임을 해도 조금 더 즐겁게 앉아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계만 보는 사람들. '내 인생은 왜 이럴까'라고 말하면서, 자기 삶을 점점 더 재미없게 만들어가는 사람들. 


  물론 삶의 모든 순간에 격정적인 환희를 느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도 그냥 지나가는 순간은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우리 해온이, 생일 축하해!

  아기를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가 얼마 전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어. 내가 혼자 외롭게 밥 먹는 시간도 중요했고, 잠 설쳐가며 애기 젖 먹이는 시간도 중요한 시간이었어. 다만 내가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뿐이더라고." 

  친구의 이 대단한 시간들이 모여 벌써 아기의 첫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내 친구의 모든 하루하루가, 모든 24시간이 아기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모든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크로노스가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개인에게 의미가 되는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간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런 사람은 외부적 요인이나 다른 사람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에 만족하는데, 이것이 '능력'인 것 같다. 이 능력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폐쇄적이고 편협적인 것과는 다르다. 이 능력은 홀로 오롯이 존재하면서, 내면의 안정감과 풍요로움을 적극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 능력치가 높을수록 홀로 있는 시간의 퀄리티가 높아지는 것 같다.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능력. 얼마든지 유익하고 즐겁게 시간을 채울 수 있는 능력. 어제와 오늘이 별다를 것 없지만 그 와중에 재밌고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시간을 자신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무슨 일을 해도, 누구를 만나도 그 모든 시간은 '나의 시간'이 된다. 누군가를 향한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 '나의 시간'은 의미 있다.  



  '밥의 시간'이 그렇다. 밥은 어떤 순간에도 오롯이 밥 자체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밥의 시간은 따분하지 않다. 매번 먹는 밥인데도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어제 먹고 오늘 또 먹어도 지겹지 않다. 오랜만에 먹는다고 유난스럽지도 않다. 밥은 아무리 오랜만에 먹어도 낯설지 않다. 

  주위 반찬들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한 그릇 간장계란밥만으로도 밥은 초라하지 않고, 10첩 반상을 만나도 밥은 우쭐대지 않는다. 주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휘둘리지 않고 밥은 밥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킨다. 


  타는 듯한 갈망이 없어도 밥은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내가 다른 것을 갈망하는 그 순간에도 밥은 그곳에 존재했다. 매 순간 불타오르는 환희는 없어도, 밥은 밥 자체로 내 옆에 있어주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떡을 갈망했던 시간은, 그리고 떡 같은 사람을 갈망했던 시간은 나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떡을 아무리 먹어도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외로웠고, 서운했고, 떡으로 인해 내 삶이 점점 우울해진다고 느꼈다. 나는 떡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의 외로움의 핑계를 떡에게 돌렸을 뿐이었다. 나는 내 일상의 어느 순간에도 의미를 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밥은 밥으로 존재했다. 떡을 먹지 못해 '밥이나 먹어야겠네'하고 밥을 먹을 때도, 냉장고를 털어 나온 온갖 재료로 '이걸로 밥이나 볶아 먹어야겠네' 하고 볶음밥을 먹을 때도 밥은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주었다. 나는 밥 앞에서 '나'로 존재하고, 밥 또한 그저 '밥'으로 존재했다. 그 시간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었다.




  밥처럼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 떡처럼 큰 즐거움과 기쁨은 아니지만, 아무튼 늘 옆에 있는 느낌을 주는 사람. '밥은 챙겨 먹었니'라는 말보다는 '밥 먹자'라는 말이 주는 느낌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 두둥실 남겨진 것 같았을 때 괜히 다가와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울 때 나를 달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괜찮니', '많이 힘들지', '그래도 잘 이겨내야지', '힘내', '너는 잘할 수 있을 거야' 같은 말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 어떤 말도 마음에 닿지 않았다. 나는 괜찮지 않았고, 힘낼 힘이 없었고, 잘 해낼 자신도 없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아줬으면 싶었다. 


  정말 고마웠던 사람은 '옆에 있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니 이런 사람은 내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의 슬픔에 유난떨지 않았다. 그냥 본인들의 일상을 살았다. 늘 그랬듯 달을 보니 내 생각이 났다면서 카톡으로 달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고, 이번 주말에는 치킨 신메뉴를 먹어야 하니 시간을 비워놓으라고도 했다. 부모님이랑 싸워서 가출했다면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재워달라지를 않나, 회사 상사가 자꾸 주말 등산모임을 추진한다면서 알리바이 좀 만들어달라고 하지를 않나... 


  그들의 일상은 나 하나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살았고, 늘 그랬듯 가끔 나와 만났다.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아서 좋았다. 그들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나에게는 '옆에 있는 느낌'이 되어 주었다. 


  밥처럼. 

  나의 고마운 밥처럼.  






  그냥 한 마디면 될걸 이렇게 길게 썼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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