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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un 10. 2020

매력적인 어른


  나는 쉬운 사람이다. 


  나는 대단한 걸 바라지 않는다. 가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지나간 연인들에게도. 기념일을 특별히 챙기는데 의미를 두는 사람도 아니고, 값비싼 선물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그저 뜬금없는 전화 한 통이나, '지나가다가 너 생각나서'라며 건네는 쓸데없는 열쇠고리 하나면 만족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나도 누군가로 인해 속상하거나 기분 상할 때가 있다. 그렇게 내가 울적해하고 있을 때 내 기분을 풀리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다. 나는 '보고 싶었다'는 말을 들으면 녹아내린다. 사르르. 아무리 화가 나 있어도, 아무리 섭섭했어도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녹는다. 일종의 치트 키인 셈이다. 


  이 말이 나를 이렇게나 말랑말랑하게 만든다면, 분명 (나보다는 조금 덜할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도 듣기 좋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매일 만나지 못해 연락만 주고받는 친구들에게도 "보고 싶네~"라고 하고, 친척들에게 안부 전화할 때도 "보고 싶어요~"라고 한다. 약속이 잡혀 드디어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는 "보고 싶었어요~"라고 하고, 한참 대화하다가 잠깐 대화가 끊기면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네~"라고 한다. 


  특히 윗사람들은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나를 굉장히 좋아했다. 학창 시절,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는 날, 담임선생님은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라고 하는 나를 아주 그냥 예뻐라 했다. 공부를 잘해야만 예쁨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보고 싶었어요!" 한마디 말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렇게 윗사람들에게 예쁨 받는 법을 터득했다. 

  해외에서 생활을 할 때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부모님께 오랫동안 전화를 한 통도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가 간신히 전화해서 "엄마! 보고 싶어요!"라고 하면 엄마는 삐쳐서 한참 화를 내다가도 순간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뭐 필요한 게 없는지를 물어보곤 했다. 


  이렇게 나는 '보고 싶다'는 말이 주는 힘을 너무나 잘 알았다. 물론 나 스스로가 들었을 때 가장 녹아내리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순간 그들이 풀어지는 모습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건 대부분 정말 보고 싶어서였지만, 때때로 필요에 따라 '보고 싶다'는 말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회사생활을 할 때 나의 이 화법은 굉장히 유용하게 쓰였다. 회사 상사, 혹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거래처 사람들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 한마디로 안 될 일도 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일 특성상 1년에 한두 번 정기적으로 다른 팀과 비즈니스 미팅을 갖는 일이 있었는데, 친근하다면 친근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는 않은 이 애매한 관계에서 웃으면서 미팅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건 "그동안 잘 계셨어요? 보고 싶었어요~"라는 말이었다. 약속을 계속 미루면서 에둘러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는 상대방에게는 "많이 바쁘시죠? 보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라는 말 한마디로 다시 재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이 방법은 친구들이나 동년배에게도 잘 통했다. 친구로 모이는 멤버 중 한 명이 토라져서 모임에 나오지 않을 때도 "이번에 시간 돼? 보고 싶어~"라고 말하면 어김없이 모임자리에 나왔고, 나의 연인들은 내가 한 번씩 "보고 싶은데..."라고 말하면 한 시간 반 거리를 10분 거리처럼 달려오기도 했다. 


  그런 내가 하루하루 더 어른이 되어갈수록, 그러니까 내가 윗사람이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질수록, 윗사람으로써 아랫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말은 어떤 게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아랫사람들도 내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좋아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아랫사람으로써 윗사람에게 예쁨 받는 말이 아니라, 윗사람으로써 아랫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그런 말 말이다. 





  얼마 전 친척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여름이 왔다고. 코로나 때문에 다들 난리라는데,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냐고. 보고 싶다고. 얼른 자유롭게 마음껏 보러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할머니는 할머니 특유의 그 겸연쩍어하는 목소리로 (하지만 아주 좋아서 이미 입꼬리를 씰룩 씰룩대고 있다는 걸 나는 알지) "그래, 그러니까 말이다"라고 짧게 답하셨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네 집 뒷동산에 봄에 꽃이 엄청 폈었다는 이야기부터, 자식들이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해서 답답하다는 이야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장장 20분이 넘는 전화통화를 끝내며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셨다. "우리, 신실하게 살자."


  전화를 끊고, 한참을 앉아 멍하니 있었다. 여운이 길었다. "신실하게 살자"라니.  


  올해 86세로 세상을 살고 계신 할머니의 이 인사는 내 마음을 울렸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 '좋은 소식 들려줘라', '시간 되면 놀러 와라' 같은 흔하디 흔한 마무리 인사가 아니었다. 


  난 이 할머니를 참 좋아한다.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 누가 물어보면 그동안은 '착하셔서', '아낌없이 베푸는 분이셔서'와 같은 이유를 댔다. 이유를 대면서도 뭔가 부족함을 느꼈지만 적당한 다른 말을 찾지 못했는데, 이 전화통화 이후로 나는 내가 할머니를 좋아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는 '어른다운 분'이시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으니 우리 할아버지의 말도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중환자실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면회했을 때, 20분간의 짧은 만남의 끝에 할아버지는 움직이기 힘든 입술을 움직여 뭐라고 뭐라고 말을 하셨었다. 그중 내가 알아들은 말은 몇 마디 되지 않지만, 대신 그 몇 마디를 또렷하게 알아들었다. "지혜롭게, 지혜롭게..." 


  이 때는 이 말이 마지막일 줄 꿈에도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이 말은 할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이 말 한마디로 할아버지는 내게 앞으로도 영영 자랑스러운 할아버지가 되었다. 동화 속 이야기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지혜롭게...'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길 수 있을까. 




  판에 박힌, 도덕적이기만 한, 이런 재미없는 말이 어른의 입을 통하니 생동생동해진다. 책에서나 볼 법한 단어들이다. '신실'이라니. '지혜'라니. 그나마도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볼 법한 교훈적인 책에서나 이런 단어를 보았던 것 같다. 시중에 쏟아져 나오는 요즘 책들 중에 이런 단어가 나오는 책이 얼마나 있을까. 일상생활에서 이런 단어를 말하며 사는 사람은 또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랫사람으로써 윗사람을 우러러보게 되는 순간은 이런 순간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은 알지만 평상시에 굳이 생각하지 않는 말을 들을 때. '신실'이라니! '지혜'라니! 


  생각해보면, 이것 말고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수많은 가치들이 있다. 우리 모두는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 줄 알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줄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평상시에 이 가치들을 과연 얼마나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을까. 손익 계산하기 바쁘고, 눈치 보느라 정신없는 삶 속에서 당연한 수많은 가치들이 뒤로 밀리고 잊혀졌다. 


  '어른다움'은 바로 이런 가치들을 되새길 수 있는 겨를을 주는 것이다. 현실은 어렵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기에. 이 '어른다움'을 내뿜는 사람이 '어른'이다. "살아가느라 힘들지? 그래도 잊지는 말아야 해. 지금 그게 다가 아니야"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어른. 



 그러므로 노인은 오늘의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버지, 우리 집이 망하게 되었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어머니, 회사가 부도났어요. 이제 끝장이에요." 하며 우는 자손들에게 "걱정하지 말거라, 그게 끝이 아니란다"라고 말하며 부정적 현실 자체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는 사람이 바로 어른이고 노인인 것입니다.

김동길, <나이듦이 고맙다> 中


  많은 윗사람들이 있지만 모두가 어른인 것은 아니다. 나이가 쌓인다고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점잖은 체하고 무게만 잡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은 꼭 해야 할 말을 해주어야 한다. 끝난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절망하지 말라고. 아무리 어려워도 놓아서는 안될 것이 있다고. 잠시 미뤄두더라도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고. 똑똑하기보다 지혜로워야 한다고. 욕심이 아닌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어른답지 않은, 그러니까 어른이 아닌 윗사람만 많은 세상인 것 같지만, 그래도 어른이 있다. 신실하게 살자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는 어른. 이런 어른은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런 매력적인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은 사로잡힌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지금까지 '보고 싶다'는 말로 충분히 사랑받았다면, 이제는 나도 조금씩 사랑을 주며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신실하게 살자"는 할머니의 말처럼 믿음직하고 착실하게 살면서,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던 것처럼 '지혜롭게' 어른이 되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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