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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Jun 02. 2020

최선을 다하지 못한 자의 슬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심근경색과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지 4달 하고 열흘 만이다.(참고 : 작가의 이전 글 <마지막 '내 편'>) 처음 쓰러지셨을 때는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아침, 저녁으로 2주 동안 면회했었는데, 코로나19가 터진 이후로는 병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병원으로 전화 걸어 간호사와 통화하며 할아버지의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난 달력을 확인해보니 마지막 면회는 2월 3일이었다. 그러니까, 2월 3일 이후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병원에서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 환자를 보러 오라고 하는 건 환자가 사망해서야 가능한 일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주검이 되어서야 나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가족끼리의 조용한 장례를 치르고 집에 오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할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슬픔과 그리움, '이제 정말 혼자'라는 고독함과 무서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데서 오는 미련과 후회, 그리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아가는 코로나19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이 가슴속에서 날뛰었다. 


  특히 약속을 못 지킨 게 가장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지난 2월 3일 월요일 저녁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할아버지한테 "내일 또 올게요"라고 했는데, 끝끝내 그 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다음날 아침 면회를 갔는데 코로나19로 병원에 비상이 걸리면서 중환자실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한 거였지만. 아무튼 나는 '또 오겠다'는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와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이런 감정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나는 울었다. 슬펐고, 그리웠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후회와 미련, 미안함과 서러움이 너무나 크다. 

  한참을 울면서 생각을 정리해보니, 이건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책으로부터 기인하는 것 같았다. 누워만 있는 할아버지에게 물 한 모금 먹여드리지 못했고, 세수 한 번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 (물론 코로나19 때문이었지만) 나는 할아버지에게 어떤 말도 해드리지 못했고,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고,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했다. 이건 내 부모님이 병원생활을 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된 감정은 후회와 아쉬움인 경우가 많았다. '그때 좀 잘할걸', '사진 좀 많이 찍어둘걸', '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걸'.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러니까요. 그때 조금 더 잘해드리지 그랬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자랑이 아니라, 아니 자랑이라면 자랑이겠지만) 내 부모님에 대해서는 후회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때 좀 더 잘할걸'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부모님을 대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든 시간을 쏟아 그분들의 옆에 있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8개월 동안 엄마 옆에서 엄마의 모든 움직임을 케어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못하게 되는 엄마 옆에 24시간 붙어 있으면서, 나는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엄마에게 주었다. 

  단 하루도 잠을 푹 잘 수 없었고, 하루 세 끼 잘 차려진 밥을 먹지 못했다. 대신 병원생활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게 되었고, 간호사가 너무 바쁠 때는 간단한 응급처치 정도는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아빠와의 시간은 그보다 더 진했다. 처음 확진을 받은 순간부터 나는 아빠와 함께 있었으니까. 아빠가 혼자서는 꼼짝도 못 하는 때가 되어서는 주위에서 다들 간병인을 두라고 권유했다. 아니면 간호간병 병동에라도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 말을 듣고 간호간병 병동으로 갔다가, 나는 하루 만에 다시 사정사정해서 일반 병동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전문인력이라고는 해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는 것보다, 나는 내가 직접 아빠를 돌보면서 함께 있고 싶었다. 물론 몸은 힘들고 피곤했지만, 내 마음은 그게 훨씬 좋았다.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아빠는 살이 많이 빠져 원래 90kg에 육박하던 큼직한 몸이 54kg까지 쪼그라들었다. 그런데도 아빠의 몸은 나보다 크고 무거웠다. 나는 그런 아빠가 욕창이 나지 않도록 3~4시간마다 몸을 옆으로 돌려주었고, 침대 위로 올라가 겨드랑이를 끌어올려 앉혀서 세수하고 면도를 해주었다. 

  잠은 밤낮 가리지 않고 잘 수 있을 때 30분씩 잤다. 한 번에 2~3시간 이상 쭉 잘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한 달 만에 체중이 6kg가 빠졌다. 그런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잠 못 자고, 제대로 못 먹고, 힘은 힘대로 엄청 쓰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빠와 끝없이 대화를 했다. 아빠의 환자복을 갈아입히며, 혹은 아빠의 발을 주무르며,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세상의 모든 대화를 했다. 내가 아빠에게 '아빠가 오늘 체중이 더 줄어서 내가 들어 올리기가 더 수월해졌네'라고 말하면 아빠는 '이렇게라도 너를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네'라고 했다. 어느 날 TV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이 나오자 우리는 함께 감격하고 함께 놀라워했다. 



  의사가 사망을 선고할 때, 엄마와 아빠와의 시간들이 필름처럼 내 눈 앞을 지나갔다. 나는 펑펑 울었는데, 그건 후회나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모든 장면이 다 좋은 장면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사람들은 나를 도대체 얼마나, 어떤 사랑으로 사랑했기에. 아직 따뜻함이 남아있는 손을 붙잡고 나는 엉엉 울며 말했다. "어떡해, 좋았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 


  이후 차분하게 앉아 계속 기억을 떠올려봐도 좋았던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기억이 미화된 건가 싶어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좋은 시간밖에 없었다. 사랑이었다. 나의 엄마, 아빠는 모든 시간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 또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엄마, 아빠를 사랑했다. 한창 창창한 나이에 병원생활에만 올인하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나는 오히려 '내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당당하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최선을 다해 케어했고, 사랑했다. 사랑이었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여태껏 아무 미련이 없는 것도, 그때 내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이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좋아했고, 충분히 즐겼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스스로 만족을 느낄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시간, 지금 여기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들에 내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렇게 내가 최선을 다한 대상들이 영원하면 너무나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내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과거의 어떤 순간을 향해서도 후회든 미련이든 하지 않는다. 

  지나간 친구들이나 옛 연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잘해주었고, 최대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많은 것들을 나누고 즐거워했다. 나는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인연이 이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슬픔은 물론 존재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나는 그들을 한껏 사랑했으므로. 그러니 미련 없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by 잔나비>


  그럼에도 슬픔과 그리움은 남는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어도 지나간 상황과 관계들이 현재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으니 한편으로는 슬플 수 있고, 때로는 그립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그때 좀 더 잘할걸'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다. 슬프지만, 공허하지 않다. 그립지만, 울적하지 않다. 이 감정은 나를 어두움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떨쳐내려 애쓰지 않는다. 이 감정은 내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계속 끌어안고 가고 싶은, 그런 종류의 감정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이 감정. 이 감정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값지다. 그래서 슬픔과 그리움마저 아름다워진다. 이 아름다움이 나를 살린다. 






  지난 4개월간, 나는 할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 모든 걸 다 쏟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운다. 슬프고 그립다. 공허하고 울적하다. 아쉽고 서럽고, 미안하다. 


  이번만큼은 아름답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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