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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May 21. 2020

존중받아야 할 존재들


  그런 시기가 있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기.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인 것 같다.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기. 의도치 않게 숨어있었든, 필사적으로 숨으려 했든, 아무튼 모든 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19가 많은 것들을 드러나게 하고 있다. 신천지도, 이태원도, 그리고...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는 쌩얼로 집 밖을 돌아다닌 적이 없다. 집 앞 슈퍼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갈 때도 비비크림은 바르고 나갔다. 맨발에 삼선 슬리퍼는 신고 다녀도 완전한 쌩얼로 돌아다닌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한 해 두 해 지나갈수록 얼굴에 하나씩 더 뭘 바르게 되었고,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메이크업을 한 얼굴이 나의 본 얼굴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내 얼굴만으로는 자신감이 뚝뚝 떨어졌다. 


  최근 1년간 가진 '쉼'의 시간은, 그러한 메이크업이 그동안 나를 얼마나 불편하게 해 왔는지를 여실히 깨닫고 하나씩 줄여나가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에 모든 메이크업을 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십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쌩얼로 집 밖을 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기본적인 베이스와 컨실러, 아이라인, 눈썹, 그리고 틴트는 참 포기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한 번은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내 화장대를 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심플 라이프를 추구하는 것 아니었냐며, 미니멀리스트는 못되더라도 그래도 이런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하려는 것 아니었냐며, 그런데 이게 다 뭐냐며, 이 수십 개의 립스틱과 베이스와 파운데이션과 브러시들은 대체 다 뭐냐며, 아직 다 버리지 못했느냐며, 그런데 <휘게 라이프, 편안하게 함께 따뜻하게>라는 제목의 책은 이 화장대 옆에 있기에는 너무 언밸런스한 것 아니냐며... 


  불필요한 많은 것들을 줄여나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한다면서도 여전히 나는 나를 숨기고 꾸몄다. 최대한 꾸미지 않는 티를 내지 않고 꾸미면서 '덜어내는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사실 이 '꾸안꾸'라는 것은 은근히 신경 쓸게 많고 생각보다 시간도 꽤 걸려서, 사실상 나는 '쉼'의 시간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함께 살아오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이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기'가 되니, 정말 생각지도 않게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 코로나 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여러 전문가들의 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나뉘며 변화하는 시기인 것 같다. (무언가가 달라지려 한다면 지금 이 타이밍이 어쩌면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있어 가장 큰 요인은 '마스크 착용'인 것 같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해도 그때는 이렇게까지 모든 사람이 마스크 착용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때만 해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왠지 조금 유난 떠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마스크를 필수로 착용해야 하는 때가 되어, 오히려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는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는 세상이 되었다.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세상이 되면서 마스크 필터나 마스크 보관함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부수적인 액세서리도 파는 세상이 되었다. 


  이 마스크 착용은 내 개인 생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마스크 덕분에, 나는 쌩얼로 집 밖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맨 얼굴로 나는 뚜벅뚜벅 집 밖을 걸어 나간다. 집 앞 산을 올라갈 때 나는 비비크림을 바르지 않고 그냥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올라간다. 심지어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빵집에 가서 빵을 산다. 아이라인을 그리지 않은 눈으로 점원의 눈을 마주 보고 할인카드를 내밀고 포인트 적립을 하고 돈을 지불한다. 

  3달 전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간단한 아침 산책이라고는 해도, 눈 뜨자마자 대충 세수하고 대충 후드티 입고 곧장 집 밖을 나가다니. 심지어 사람을 만나다니! 아무리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마스크가 메이크업을 대신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쌩얼로 여기저기를 다닌다. 물론 마스크 덕분에 첫 쌩얼 나들이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익숙해지면서는 꼭 마스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쌩얼로 집 밖을 나가게 되었다. 

  약국에 가서 신분증을 내밀면서 마스크를 잠깐 내려 본인 확인을 해주고, 운동 후 쌩얼로 시장에 가서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산다.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나는 쌩얼로 친구를 맞이하고, 헤어질 때는 쌩얼인 채로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준다.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 온종일 보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내 원래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내 원래의 얼굴을 이렇게 하루 종일 똑바로 바라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메이크업으로 길들여진 나의 얼굴이 힘들어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나는 내 얼굴에게 이제야 숨을 쉴 틈을 주었다. 


 

 이제야 내 얼굴에 '메이크업'이 아닌 '관심'을 더하기 시작했다. 내 거칠거칠한 피부를 가리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썼었는데, 원래의 내 피부를 보살피고 있다. 이제는 기초제품을 꼼꼼히 바르고, 귀찮기만 했던 딥 클렌징과 스크럽에도 시간을 쓰고 있다.


  거울 앞에 앉는 건 항상 메이크업 때문이었는데, 이제 내 얼굴을 똑바로 보기 위해 거울 앞에 앉는다.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기'가 되니, 어떤 존재도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모든 존재가 자신의 시간과 위치를 확실히 하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이렇게나 다양한 장소에, 이렇게나 모든 시간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숨었고, 세상도 그들을 숨겼다. 그래서 없는 듯이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데, 왜 어떤 존재들은 거부당해야 했던 걸까.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존재를 증명하라며 강요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은 마땅한 걸까.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부정당하며 살아온 수많은 시간 동안 그들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대했을까. 존중받지 못한 그 모든 시간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 걸까. 


  ...


  스킨, 로션과 에센스, 아이크림을 꼼꼼히 바르면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아이라인이 없는 내 눈꼬리는 약간 아래를 향한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아랫입술 한가운데는 보일 듯 말듯한 점이 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내 피부는 불그스름하다. 

 

  이대로의 내 얼굴을 바라본다. 숨기는 게 당연했던 숱한 시간을 지나고 때마침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기'를 기회로 삼아 이 자체로의 내 얼굴을 받아들이고 드러낸다. 내가 이렇게 여기 있다고. 이 모습 이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이게 시작이다. 

  나는 내 동그란 얼굴을 존중하고, 이렇게 생긴 나를 존중한다.


  나는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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