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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May 15. 2020

이번 생은 튼튼하게



  예전에 아빠와 대화하다가, "나는 참 의심이 많은 사람이구나"하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정보든 한 번에 쉽게 믿지 않는다. (아마 내가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나는 어떤 뉴스를 보아도, 어떤 기사를 접해도 '믿을만한 건가?'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누가 그랬대'라는 말이나 찌라시, 광고, 민간요법 같은 검증되지 않은 모든 것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최근에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다 보니, 기사로만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접하게 된다. 코로나가 어떻고, n번방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정보들과 믿지 말아야 할 정보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느낌이다. 물론 전부터 계속 그래 오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인풋이 전혀 없으니까. 그러는 와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가짜 뉴스도 많이 생기고 있다. 


  나는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닌 그런 이야기들은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나는 그런 확인 안 된 이야기들을 믿고 싶지 않다. 아니, 듣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듣는 자체가 조심스럽다.


  사람의 경우는 조금 더 조심스럽다.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눈으로 보고 알 수 없으니까.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예의 있게 사람들을 대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모두 수긍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든 웃으며 상대해주지만 그의 모든 말을 절대 냉큼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사람은 말하면서 자기를 꾸미고 남을 속인다. 그래서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은 아무 의미 없다. '믿을만한 사람이다'라고 판단하기까지는 여러 번 겪어보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보고 오랜 시간 보아온 사람도 알고 보니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적도 여러 번이어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든 쉽게 의지하지 않는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슬퍼도,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아무 앞에서나 울지 않았다. 옆에 있는 사람을 봐 가며 슬퍼했고 힘들어했다. 괜한 사람들에게 내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 겉으로는 나를 위로해줄지 몰라도, 속으로는 나의 아픔을 보며 본인이 위로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나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대외적인 나의 모습은 '씩씩함'과 '똑부러짐'으로 통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 일을 해결해주러 달려가기는 해도, 나의 문제를 주위에 오픈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내 또래 사람들은 흔히 겪지 않는 여러 큰 문제들을 겪으면서도 나는 주위에 별로 알리지 않았다.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그런 사람들에게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 고민했고, 혼자 아파했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했다.

  친구들과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그런 류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화제가 그쪽으로 쏠리면 나는 빙긋 웃으며 "괜찮아. 다 끝났어."라고 말할 뿐이었다. 종종 만나는 친구들이나 정기적 모임으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들 자기 힘든 이야기 하며 하소연할 때, 나는 나의 이야기는 딱히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씩씩하고 똑부러지는 사람이 되었다. 후배 한 명은 나에게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라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라서, 피가 나올 때가 있다. 한 방울 두 방울이 아니라, 줄줄줄 흐를 때가 있다. 나도 아플 때가 있고, 속상할 때가 있다. 나도 서운하고, 슬프고, 괴로울 때가 있다. 보통, 나는 그런 감정을 사람들에게 잘 드러내지 않지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감정을 드러낸다면 그건 그 사람이 그래도 될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조심스러운 성향'도 한몫을 한다고 본다. 대체 나는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지, 뭔가를 한 번에 확 하는 경우가 없다. 물건 하나를 사도, 나는 절대 충동구매를 하지 않는다. 뭔가가 정말 마음에 들어도, '정말 사도 괜찮을지', '광고에 속는 것은 아닌지', '내가 과연 이걸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지'를 몇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묻고 구매한다. 그렇게 산 물건을 단순변심으로 반품을 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한번 구입한 것은 계속 열심히 잘 사용한다.


  나는 매사에 이런 식이다. 이렇게 의심 많고 조심스럽기만 한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것은 정말 많은 생각과 다짐을 이미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충분히 확인하고, 충분히 고민한다. 그래서 한 번 하기로 한 것은 끝끝내 해내고, 한 번 믿기로 한 사람은 끝까지 믿는다.

 


  할아버지는 예전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던 적이 있다. "너는 심지가 굳은 아이야.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을게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린 결론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내린 결론으로 최근 1년간 매일 몸을 움직이며 운동하고 있고, 매일 책을 보고, 6개월째 브런치를 꾸준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꿈을 꾸고, 구상하며 준비하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결국 사람은 믿을게 못 된다고 하지만, 일단 믿기로 했으면 그냥 믿는다. 나중에 그 사람이 차갑게 변하든, 나에게 나쁘게 대하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내 몫은 그저 믿는 것이다. 믿기로 했으니까.


  결론을 내리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결론을 내렸다면 흔들리지 않는 것. 아마 그게 할아버지가 보아 온 나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서, 웬만해서는 사람에게 내 감정을 토로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감정을 토로할 곳이 필요해서,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블로그나 sns 같은. 

  본격적으로 브런치를 시작하면서는 보다 정리된 감정을 정리된 글로 쓰게 되었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이 브런치는 사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 자체가 많이 부담이 되었었다. 조회수가 늘고 구독자가 생기는 모든 상황들이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되었지만) 나는 조심스러웠다.

  특히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의 격한 감정들을 알게 되는 것이 가장 민망한 부분이어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브런치를 해왔다. 그러다가 한 두 사람에게 내가 브런치를 한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렸는데, 그들이 나의 브런치를 읽고 구독자가 되어 하트를 눌러주는 걸 보며, 나는 또 부끄럽고 민망한 감정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 최근, 누군가가 내 브런치를 읽고 '튼튼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나보고 '튼튼한 사람'이라면서.


  '튼튼하다'는 말을 듣고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의심과 조심스러은 '튼튼함'을 지향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확실한 것이 아니면 믿지 않고,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의지하지 않는 나는 사실 튼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는 믿어야 할 것을 튼튼히 믿고 싶었고, 사람들과도 튼튼한 관계를 맺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설픈 정보들이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 나의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대신 믿어야 할 것을 확실히 믿었고, 깊게 맺은 관계를 소중히 했다.


  '튼튼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치, 이 생에서 내가 이루어야 할 인생의 목표를 다 이룬 느낌이다. (만큼 감격적이었다는 말이다.)   


  '튼튼'이라는 한 단어로 나의 모든 것이 설명되고 정리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튼튼하고 싶어서였고, 책을 보고 브런치를 하는 것도 튼튼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그동안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모든 순간들은 결국 튼튼한 몸과 튼튼한 마음으로, 튼튼한 생각을 하고 튼튼한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튼튼함들이 모여 나의 삶을 튼튼히 꾸려가고, 그 삶을 살아내는 나의 영혼 또한 튼튼해지는 것이 나의 지향점이었다. 






  튼튼한 일생을 가꿔보리. 

  이번 생은 튼튼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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