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워녕 May 03. 2020

바람과 별과, 바다와 노래

우리의 강릉 


  2년이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우리 아빠의 시신은 기증되었다. 아빠는 살아생전 이미 아주 오래전에 대학병원 시신기증센터에 본인의 몸을 등록해 놓았었다. 의학적 연구와 발전을 위해. 시신을 모셔간 곳에서는 이런저런 공부를 하고 연구를 했고, 1년 반쯤이 지나서야 화장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시신을 기증했으니 처음부터 매장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골함을 가지고 납골당에 가지도 않았고, 수목장이나 바다장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지난 오랜 시간 아빠와 함께 대화하고 내렸던 결론, 즉 '몸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결론을 가지고 화장터 옆에 작은 유택동산에 유골을 뿌렸다. 우리가 엄마의 유골을 그렇게 했듯이. 


  이후 가끔, 주위에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아버지 기일에는 뭘 해요?", "갑자기 아버지가 엄청 보고 싶을 때는 어딜 가서 만나요?" 




  아빠와 나는 여행도 참 많이 다녔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더 자주 단둘이 여행을 다녔다. 국내의 이런저런 여행지를 여기저기 참 많이도 갔지만, 특히 강릉을 많이 갔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늘 강릉이었다. 바람 쐬고 싶으면 강릉에 갔고, 쉬는 날 집에 있기 싫으면 강릉에 갔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강릉에 갔고, 순두부가 먹고 싶으면 강릉에 갔다. 갑자기 서로 마음이 맞아 "강릉 가서 바다 보고 순두부 먹고 옵시다!"라며 깜깜한 새벽에 출발해서 순두부 먹고 바다 보고 저녁에 오기도 했고, 시간이 되면 하룻밤 자고 오기도 했다. 

  하룻밤 자고 올 때는 주문진시장에 들르기도 했다. 요즘은 오징어가 귀해져서 쉽게 못 먹는 음식이 되어버렸지만, 예전에는 동해안에 널리고 널린 게 오징어라, 그 자리에서 직접 떠 준 오징어회를 먹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었는데, 먹던 오징어회를 갓 지은 따끈한 밥에 초고추장과 함께 슥슥 비벼 참기름 쓱 뿌려 먹으면 그게 또 그렇게 맛있었다. 


  지난주 수요일은 아빠가 돌아가신 지 딱 2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매일, 늘 아빠가 보고 싶지만, 이 날은 유난히 아빠와 대화하고 싶은 날이 될 것 같아서, 나는 이미 한 달쯤 전부터 이 날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고민하고 계획했다. 


  일단, 강릉에 가야 했다. 그 강릉에. 




  나는 아빠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 엄마가 없는데,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라고 예전에 아빠와 대화했던 것처럼, 지금 분명 아빠가 없는데,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집안 곳곳에 아빠의 흔적이 있고, 나의 얼굴에 아빠의 얼굴이 있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서 아빠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그리움이 사무치도록 들이닥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아빠와 대화하고 싶을 때다. 아빠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오늘 이런 일이 있었다고. 오늘 어떤 책을 봤는데, 글쎄, 아빠한테 꼭 말해주고 싶었다고. 그리고 최근에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냐면...  


  특히 최근 몇 달 동안은 아빠와 '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우리 집 앞에 나오면 보이는 나란한 별 세 개, 우연히 본 몽골의 밤하늘 사진, 영화 <천문>, 윤동주, 적재의 노래 '별 보러 가자', 그리고 생텍쥐베리. <어린 왕자>로 유명한 생텍쥐베리는 비행기 조종사였다고 한다. 별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선택한 직업이었다는 걸 알게 되고서는 눈물이 다 났다. 그가 쓴 또 다른 책인 <인간의 대지>를 보면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데, 이 책을 관통하는 단어는 역시나 '별'이다. 


  강릉여행을 계획하면서 '별'을 염두에 두었다. 아빠와 그토록 대화하고 싶었던 '별'. 


  한참을 찾다가, '안반데기'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출발해서 7시 반쯤 도착했더니, 해가 지고 있었다. 눈 앞에는 온통 보랏빛 하늘로 그득한 해발 1100m의 안반데기. 풍력발전기의 유려한 3개의 날개가 그 모든 광경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초승달이 선명해지고 별이 하나씩 드러났다. 



  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드러났다. 새벽 2시쯤에는 모든 별이 다 나왔던 것 같다. 내가 예전에 필리핀에서 보았던 밤하늘을 뒤덮는 그런 별들은 아니었다. 다만, 선명했다. 수많은 선명한 별들. 어찌나 선명했던지, 하나하나의 별자리가 다 그려질 지경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눈으로 밤하늘을 보고 별자리를 기록했다길래 그 옛날 사람들은 시력이 대체 얼마나 좋았던 건가 했더니, 이 정도 선명함이라면 충분히 가능했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차 안에 누우니 차 앞유리에, 오른쪽 왼쪽 창문에, 그리고 뒷유리에 온통 별이 가득했다. 하나씩 별이 떨어지는 모습도 보였다. 하염없이 별만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냥 그렇게 있다가 잠들었다. 


  해가 올라오면서 온 사방이 밝아졌다. 덕분에 잠이 깼다. 동네 한 바퀴를 달리면서 해 뜨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침을 먹으러 순두부집으로 갔다. 아침 7시에 첫 두부가 나오는 이곳은 원래 아빠와 나만의 비밀스러운 맛집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수요미식회'에 방영이 된 이후로 북적북적한 식당이 되었다. 내가 간 날은 다행스럽게도 코로나19 때문인지 사람이 없었다. 나는 첫 손님이었고, 내가 다 먹고 나올 때까지 다른 손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오붓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와 함께 왔을 때도 거의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다른 손님 없이 우리 둘이 앉아 순두부를 먹는 오붓한 시간. 하긴, 동네 주택가도 아니고, 그런 관광지에 누가 아침 7시부터 순두부를 먹으러 일부러 차 끌고 여기까지 올까. 


  그리고 드디어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갔다. 아침 8시의 강릉 바다는 눈이 부셨다. 


  사실, 작년의 이 날, 그러니까 아빠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던 날도 나는 강릉 바다에 왔었다. 그때는 바다가 눈에 들어온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웬 묵직한 덩어리가 치밀고 올라오면서 울컥하는 바람에 운전하다 말고 엉엉 울고 말았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이 깨끗하고 선명한 눈부심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작년에는 이 바다 앞에서 밤새도록 하나님, 하나님을 부르며 그렇게나 울었는데, 오늘의 이 바다 앞에서는 하나님, 하나님을 부르며 숨을 쉬었다. 



  전날 밤의 별들이 그렇게나 선명했던 것처럼, 그리고 이날 이 아침의 바다가 또 이렇게나 선명한 것처럼, 아빠와의 모든 시간들이, 그리고 그 이후의 2년이 나는 선명하다. 


  아빠 없는 강릉이었지만 여전한 강릉이었고, 여전한 바다였다. 아빠 없이 순두부를 먹었지만 순두부는 여전했고, 아빠 없이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이 노래마저 여전히 내 마음을 울렸다. 아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 아빠가 있다. 아빠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강릉의 모든 장소들이 나에게 아빠를 보여준다. 바다 내음이, 파도 소리가 나에게 아빠를 보여준다. 바다 위의 하늘이, 하늘 밑의 바다가, 모래사장이, 그리고 해와 구름이 아빠가 여기 있다고, 너의 옆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안반데기에서 나의 온몸으로 다가왔던 별바람처럼, 그리고 강릉 바다의 바닷바람처럼,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감각한다. 



  그래서 아빠 없는 2년을 보낸 나의 삶 또한 여전했다. 아빠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빠가 알려준 많은 것들이, 아빠와 보낸 많은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빠 덕분에 나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졌으면서도 쉽게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순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이 존재 자체로 아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살아서, 이렇게나 살아남아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이 없기도 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나 많은 일을 하기도 하는, 그런 시간을 보냈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도 모든 파도가 다 같은 파도가 아니듯, 나의 모든 하루는 어느 하루도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시정지'로 멈춰있는 시기인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아빠 없는 처음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하고 최선을 다해 문제를 해결했고, 이후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운동하고 책을 보면서 최선을 다해 쉬었다. 


  그 모든 시간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영혼이 단단해진 기분이다. 1년 전만 해도 그리움이 폭풍처럼 몰려와서 갑자기 엉엉 울던 날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려 이 강릉 바다를 보아도 평온할 수 있게 되었다. 깊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 엄청난 그리움마저 끌어안을 수 있는 정도의 깊음. 아빠와 이야기하며 보낸 삼십여 년이 나를 성장시켰고, 아빠를 바람처럼 느끼며 보낸 지난 2년은 나를 견고하게 했다. 모든 시간은 아빠와의 시간이었다. 






  안녕 아빠. 

  난 오늘도 잘 지냈어요. 

  내일도 잘 지내볼게. 








작가의 이전글 순조로울 운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