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16_북리뷰-_나와 디탄_2021.7.6.

by 제대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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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_북리뷰-_나와 디탄_2021.7.6.


중국 문화혁명 초기 1966년~1967년까지 전국 중, 고등학교가 휴교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하방운동(농민에게 혁명사상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도시 청년을 농촌이나 산촌 벽지로 보내 육체노동을 시킨 사회운동)의 이름으로 농촌생산대에서 일했다고 한다. 문화혁명시기(1966~1976년)에 도시의 학생들,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현지 생산대에서 노동한 것을 말한다. 지은이 사철생은 중학교 졸업 후 생산대에서 일하다가 척추 손상으로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휄체어 생활을 한다. 그의 나이 20세 때 일어난 일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희노애락을 경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가혹한 운명에 대처하기에는 많은 세월을 살았다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20세 나이에 느꼈을 그 절망과 참혹함은 짐작하기도 어렵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지은이는 디탄 공원(디탄은 명나라 시대인 1530년에 세워진 제단으로 명, 청시대 제왕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다. 현재는 이곳을 공원화했다.)에 매일 간다.


나는 디탄 공원을 우리나라의 종묘 정도로 이해했다. 중국은 어떠한지 잘 모르지만 종로에 있는 경복궁이나 덕수궁 그리고 종묘에 가면 견고하고 높은 촘촘한 담장을 따라 걷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도 지은이는 휠체어을 타고 디탄 공원의 담장 앞에서 자신의 가혹한 운명과 세상의 커다란 벽을 맞닥뜨렸으리라 생각된다.


지은이는 디탄공원에 죽기 위해, 죽고 싶은 마음으로 매일 갔는데 죽음과 다르지 않는 매일의 삶에서 디탄 공원의 벽과 나무들을 통해 죽기로 결심한 마음은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죽음과 같은 일상은 사색과 독서와 글쓰기의 삶으로 연결하였다. 해결할 수 없는 장애와 청춘이라는 조합의 답은 불행이고 절망같다.


삶이 주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과제들을 앞에 두고 우리는 어떤 정답지를 내야만 할까? 가혹한 운명앞에 인간은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지만 또 한편으로 한없이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20세 청춘의 불행앞에서


“우선은 한번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가혹한 운명앞에서 엄청난 많은 말들이 오고간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말은 많지 않을 수 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삶이란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더라도 살아가는 그 자체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 정착역은 죽음이듯이 죽음앞에서도 또다른 삶을 써내려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질 순간에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지은이가 오랜 세월 매일 공원 구석구석에 휠체어 바퀴자국을 남겼듯이 그 뒤를 따라 무수한 발자국을 남긴 어머니가 있다. 지은이가 죽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건 아마도 어머니 역할 아니었을까 확신한다. 어머니의 태을 통해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머니라는 의미는 생명과 삶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나와 디탄>을 읽고 수필집이 이렇게 감동적이고 눈물 겨울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운명같은 불행앞에서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개나 될까? 불행은 극복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냥 자포자기하는 것도 아닌 또다른 차원의 삶으로 가는 환승같다는 생각을 했다.


극복이라는 단어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쓰면 안 된다고 최근에 들었던 장애인 인식 개선 연수에서 들었다. 극복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상대방이 가진 장애가 노력해서 개선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하고 쓰이는 말이기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한 사고를 의미한다고 한다. 우리가 의미를 두지 않고 쓰는 말들이 의미가 그 행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섬세한 관찰과 조용한 사색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나와 디탄>을 읽으며 느꼈다. 나는 삶이 계단 오르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매일매일은 계단을 오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고 성장하고 성취하고 이겨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계단을 오른 하루는 왕성하고 의미 있는 하루가 되고 오르지 못하고 오히려 계단을 내려가면 고통스럽고 의미 없는 하루가 되었던 거 같다. 그러한 하루들의 방향은 오로지 앞을 향해 있었고 당연히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던 거 같다. 문득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멈춰 섰을 때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만들어 놓은 삶의 계단이라는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계단이고 그 계단의 어디쯤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와 디탄>에서 지은이 공원의 산책을 통해 시작도 끝도 없이 끝없이 연결된 삶의 계단에서 죽을 때까지 오른다 해도 그 끝에 도착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에게 계단을 오른다는 개념이 참 의미 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없는 계단에서 올라간들, 내려간다 한들, 계단에 멈춰 앉아 있던 별 차이가 없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무의미한 삶의 운명의 계단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나약하고 아무 존재가 없는 것일까? 나의 대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각자의 몫이 아닐까? 나 자신이 삶의 계단 위에서 어떻게 할지는 개인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오랜 시간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다. 하루에 일기 쓰듯이 야금야금 읽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점심시간 지나가는 동료가 고개를 숙여 자를 대고 줄을 긋는 나를 보고 막 웃는다. 이렇게 줄을 치며 책을 읽는 모습에 그냥 웃음이 나왔다고 신기하다고 말을 건넨다.

나는 그냥 웃는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줄을 쳐! 그러고 보니 좀 웃긴 거 같아”

다음은 내가 줄을 그은 부분들의 일부이다. 다 읽고 나서 다시 줄을 그은 부분을 읽으면 왜 내가 이곳에 줄을 쳤을까 싶지만 대부분은 내가 왜 그곳에 줄을 그었는지 나는 안다. 나의 마음을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의 고민에 작가가 대답하고 있을 때 줄을 긋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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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

그때 나는 엉망진찬으로 뒤틀려 있었다. 귀신에 들린 듯 미친 듯이 집을 뛰쳐나갔다가, 공원에서 돌아와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쉽게 물어볼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아는 어머니는 몇 번을 망설였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어쩌면 어머니 역시 해답을 모르셨으리라.


(p16)

한번은 어느 작가가 이야기를 나누다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를 위해서,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시라고”


(p17)

어머니가 돌아가신 계절이 되면 지난 일들이 선명해지고, 어머니의 아픔과 위대함도 내 마음속에 깊이 파고든다. 하느님의 배려는 아마도......맞았다.

‘어머니는 이제 없다’

(p21)

공원 곳곳에는 나의 휠체어 바퀴 자국뿐 아니라, 휠체어가 지나간 자리마다 어머니의 발자취도 함께 남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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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0)

제아무리 오만한 사람이라도 병실 침대에 누우면 모두 겸손해진다.

병상에 눕게 되면 누구나 신을 찾게 된다.


(p71)

동화가 유감스러운 것은 너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보다 휠씬 더 복잡하고 휠씬 더 잔혹한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동화는 그저 너무 나약할 뿐이다.


(p104)

‘아무것도 대단할 게 없는’ 날들도 결국엔 끝이 나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단계에 이르면 아마도 ‘시원하게’ 담장으로 달려가 부딪히게 될 것이다. 담에 부딪쳐도 죽지 않는다면 그 다음 단계는 고개를 들어본다. 그때 담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숨고 싶고 피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의미는 채권자처럼 당당하게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

이 하루 뒤에 이어지는 많은 날에서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무수한 의미에서는 결국 벗어날 수 없다. 한 번의 여행은 피할 수 있어도, 삶이라는 긴 여행은 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p106)

삶의 의미를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삶과 존재에게 무게감을 요구하는 것이다. 각종 무게는 담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제대로 측량된다. 하지만 많은 무게는 죽음의 신의 저울 위에서는 여전히 가볍다. 저울 눈금은 터무니없게도 평형에 가깝다. 때문에 무게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지치고, 삶을 갈망하고, 그 인력 아래서 기꺼이 생명을 다 소모하고자 할 수 있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깨어 있는 상황에서 따르는 것이다.


(p107)

담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담을 벗어나기 위해, 담 아래로 걸어간 적이 있다.


넋이 나갔던 그 세월동안 나는 휠체어를 밀고 거기로 가곤 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조용하고 적막했다. 조용한 나와 조용한 담벽 사이에는 야생화가 가득했고, 억울함이 가득했다. 나는 주먹을 쥐어 담을 쳤고, 돌로 내리찍었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욕을 해댔다. 하지만 담장은 약간의 흙먼지만 떨굴 뿐 전혀 미동도 없었다. 하늘이 변치 않는 한 도리 역시 변치 않는다.


늙은 측백나무는 천년을 하루같이 가지를 뻗었고, 구름은 하늘 위를 걷고, 새는 구름 위를 날고, 바람은 풀숨에 오르고, 야생풀은 대를 이어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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