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지는 기피채소 1순위다. 생으로 먹을 수도 없고 익히면 물컹거리고 흐물거리는 식감이 입맛을 떨어뜨린다. 엄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가지를식탁에 올렸다.
식탁에 가지만 올라오면 반찬투정을 부렸는데 이상하게 가지밥은 그래도 곧잘 먹었다. 부드러운 식감에 일찌감치 빠진 것 같진 않고 밥 사이사이 박힌 가지를 일일이 거를 수 없어서 애초에 포기한 느낌이랄까.
나이가 들고 입맛이 변한 건지 어느 날부터 나서서 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밑반찬으로 가지무침이 나오는 식당에 가면 “사장님, 리필이요!”를 외치고, 중국집에서도 탕수육이나 팔보채 같은 요리 대신 어향가지나 지삼선을 시키곤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나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가지를 '어른의 맛'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른 즈음부터 가지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니 얼추 맞는 말도 같다.
가지를 쪄 부드러워진 식감은 어느 양념이든 잘 흡수한다. 무침에도, 튀김에도 잘 어울리는 식재료다. 가지밥에도 미리 만들어둔 양념장을 쓱쓱 비벼 먹으면 한 그릇을 금방 비운다.
엄마는 체망에 가지를 찌고 미리 만들어둔 간장양념을 끼얹어 가지무침을 만들기도 했다. 십수년이 지나 나도 엄마가 해준 맛을 생각하며 냄비에 체망을 얹고 가지를 쪄본다.
실패다. 가지가 한참 덜 익었다. 다시 찐다. 또 실패다. 아직 덜 익었다. 또 찐다. 또 실패다. 이번엔 너무 익어 질척거린다. 불 끌 때를 한참 놓친 가지에 간장양념을 섞으니 그래도 제법 비슷한 맛이 난다. 가지는 조금 흐물거려도 용서가 된다.
요즘 웬만한 채소는 다 하우스로 짓다보니 가지의 철을 잊고 살았는데 냉국을 보자 가지가 여름 채소라는 게 단번에 떠올랐다. 여름방학, 할머니네 앞마당에 나가면 가지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데 엄마는 한두개를 똑 따서 그걸로 냉국을 만들어주곤 했다. 오이로만 먹던 냉국을 가지로 먹다니. 그땐 질색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 엄마의 가지냉국이 이따금씩 생각나곤 한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까지 가지는 제철인데 날이 차가워질수록 가지는 단단해져서 부들부들한 매력을 잃는다. 취향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 취향은 보드라운 쪽이다.
지삼선을 좋아하는 것도 부드러운 식감 때문이다. 몇 년 전 양꼬치에 꽂혀 꽤 자주 양꼬치집을 갔는데 평소에 사이드메뉴로 먹던 꿔바로우나 옥수수온면이 지겨워 새롭게 시킨 게 지삼선이었다. 처음엔 가지튀김인 걸 모르고 시켰다. 메뉴판에 ‘지삼선(地三鮮)’이라고 돼있어서 내 멋대로 생선요리인줄 알았다.
기름을 머금은 가지는 양념과 어우러져 이질감 없이 치아를 뚫고 지나갔다. 취기에 젖어 가지에 좋은 추억이 남아서인지 그 후부터 가지요리를 곧잘 시켜먹곤 한다.
최근에는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있던 마파두부소스에 두부 대신 가지를 넣고 어향가지덮밥을 만들었다. 당연히 식감은 부드럽고 대기업의 맛은 실패가 없다.
엄마가 가지무침 한 젓가락만 내밀어도 입을 꾹 닫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가지 예찬론자’가 됐다. 부드러우면서 흐물거리고, 때때로 단단했던 그 시절 그 느낌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