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
음식을 가리지 않는 내가 근 10년 동안 입에도 대지 않았던 음식이 있다. 바로 잡채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잡채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었는데 누구네 잔칫집에서 잡채를 무지막지하게 먹고는 급체를 해서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그 후로는 이상하게 잡채가 크게 당기지도 않고, 한 입만 먹어도 체해서 정말 꼴 보기도 싫은 음식이 됐다.
밉상인 언니가 싫어하는 음식이어서 그런가? 내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잡채다. 입이 짧고 편식이 심했던 동생이 유일하게 주기적으로 엄마에게 해달라고 조르던 음식이었다. 엄마는 동생이 해달라는 말 한마디면 손이 많이 가서 귀찮은 그 음식을 아무말 없이 슥슥, 만들어줬다.
잡채는 당면에 각종 채소를 섞어 간장간을 하면 완성되는 음식인데 말이 쉽지 손이 정말 많이 가는 요리다. 당면은 당면대로 불리고, 못해도 서너가지가 들어가는 채소는 일일이 다듬어 하나씩 볶은 뒤 한 데 섞어야 한다. 그리고 조금조금씩이었던 그 재료들은 합치는 순간 산이 된다.
1+1은 2가 돼야 하는데 잡채에서만큼은 1+1이 4나 5쯤 되는 기분이다. 분명 생각했을 때는 요만큼이었는데 만들고 나면 이~~~~~만큼이 된다.
내가 잡채를 안 먹은 지 몇년이 됐을까. 엄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당면을 빼고 채소와 고기만 섞은 볶음을 해주었다. 당면이 없으니 같은 간장 양념에 같은 재료가 들어갔는데도 전혀 다른 음식 같았다. 잡채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한그릇을 금방 비워냈다.
엄마가 '당면 뺀 잡채'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 후로는 자연스럽게 잡채를 먹을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음식에 빠지면 질릴 때까지 먹는 스타일인데 요즘엔 중국집만 가면 잡채덮밥을 시켜먹을 정도다.
밖에서 파는 잡채엔 당면이 대부분이고 당근이나 시금치는 보일 듯 말듯하다. 예전에 엄마가 만들어준 것 같은 잡채를 먹고 싶어서 당면 대신 콩나물을 넣고 각종 채소를 푸짐하게 준비했다.
먹을 땐 몰랐는데 정작 내가 만들려니 생각보다 손이 정말 너무 간다. 일일이 볶아서 식힌 뒤 그걸 또 다같이 섞으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설거지거리가 쌓이는 것도 은근 부담스럽다.
안 되겠다. 다 섞어서 볶자. 단단한 당근부터, 그다음엔 양파, 그다음엔 살짝 데친 시금치와 콩나물.
그런데 웬걸? 맛에는 별 차이가 없다. 나 왜 지금까지 고생한 거지? 앞으로는 이렇게 자주 해야겠다. 이걸 비법이랍시고 엄마에게 말해주면 "음식에 정성이 없다"며 타박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