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짐의 순간

그가 집을 떠난 날.

by 서이든

그가 집을 떠난 날


그날 나는 사무실에 있었다.
아이들보다, 남편보다, 회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던 시간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떠났고, 재정은 무너졌고, 남편은 종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점점 비어갔고, 그 빈자리마다 서류와 미지급된 청구서가 쌓여갔다.
나는 엑셀 파일을 열어두고 멍하니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7살짜리 딸이었다.
“엄마, 아빠가 등산 가방을 메고 나가… 주차장 간대.”

그 말이 너무 평온하게 들려서 오히려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의 말투에는 작은 불안이 숨어 있었다.
아마 이 아이도 느꼈을 것이다.
아빠가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떠나는’ 중이라는 걸.

나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아빠가 볼일이 있나 보네. 엄마 금방 갈게. 오빠랑 놀고 있어.”
통화를 끊고 모니터 앞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손끝이 떨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나는 거실 CCTV를 켰다.
모니터 화면 안에는 너무 평범한 하루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아이 둘은 거실에서 놀고 있었고, 남편은 자기 방 문을 열어놓은 채 등산 가방을 꺼내어
하나씩 물건을 집어넣었다.
노트북, 카메라, 충전기, 셔츠 몇 벌.
가방을 메고, 아무 말도 없이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울지 않았다.
눈물이 아니라 현실감이 사라졌다.
‘지금 이게 진짜 일인가?’
아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그 시선을 외면한 채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닫혔다.
그게 그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우리의 15년의 결혼 생활이 사실 상 일방적으로 종료된 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장면은 나에게 한 문장으로 남았다.

“누군가를 떠나는 데도 말이 필요 없을 수 있구나.”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그날의 침묵이 더 큰 배신이었다.
그건 사랑의 배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의 떠남은 내게 ‘죽음’과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신이 내게 사약을 건넨 순간이기도 했다.
그 약을 마시지 않으면
나도, 아이들도, 함께 썩어갈 거라는
어떤 조용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렸다.

나는 그날 알았다.
이건 ‘이별’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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