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항복과 수용의 날
최근 또다시 전신에 습진이 돋아 피부과를 찾았다.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 약을 처방받았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이유도 없이 다시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인생은 아주 오랫동안 ‘가려움’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나를 따라다닌 아토피는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결핍의 상징이었다.
수험생 시절, 덮쳐오는 가려움을 잠재우려 수시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처방받은 약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강한 항히스타민제인 줄도 모른 채, 나는 그저 잠이 많은 한심한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 시절을 버텼다. 저녁 식사 후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독서실에 가야 하는데, 약을 먹고 두 시간쯤 지나면 어김없이 약효가 차올랐다. 나른함과 졸음. 그것은 각성과 정반대 되는 작용이었다. 나는 그렇게 졸리게 만드는 약을 먹으며, 동시에 각성하기 위해 처절하게 애썼다. 이제 와 돌아보니 그때의 내가 참으로 안쓰럽다.
“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짐을 졌을까?” 원망 섞인 기도의 끝은 늘 하나였다. 이 지긋지긋한 질병으로부터 제발 자유로워지게 해 달라는 것.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것은 마음의 병이었다. 짓무른 내 피부를 보고 누군가 나를 혐오하진 않을까, 나를 거절하진 않을까 하는 뿌리 깊은 불안. 내 인생은 타인에게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위태로운 사투의 연속이었다.
기이하게도 내 안에는 두 명의 내가 공존했다. 불안과 사투를 벌이는 초라한 나,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스스로 무엇이든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나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또 다른 내가 불안한 나를 내면 깊숙이 밀어 넣으며 살았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기도를 반복하며, 질병만 없으면 완벽할 텐데 하며, 아토피로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는 전진해야만 했다. 이 열등감을 숨기고 내 길을 찾아가야 했기에, 멋지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기에, 나는 불안한 나를 방 안에 가둬두고 ‘근자감’ 넘치는 나를 앞세워 인생을 주도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이라 믿었다.
나약하고 불안한 진실의 나를 외면하고 살았기에, 나는 늘 원인 모르게 외롭고 피곤했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왜 그런지 알지 못했다. 숨겨진 내 존재를 인식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그저 더 즐겁고, 더 역동적이며, 더 도전적인 인생을 사는 것에 집착했다. 더 멋진 경험을 위해 공부했고, 더 좋은 대학에 가서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낯선 문화적 충격을 갈구하며 해외로 떠났고, 비범한 인생을 살겠노라 다짐하며 국제결혼까지 감행했다. 그 모든 행보는 숨겨진 불안을 더 깊이 매장하기 위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기 위한 질주였다.
그러나 인생의 처참한 밑바닥에 이르렀을 때, 역설적으로 나는 그토록 갈구하던 ‘자기 수용’의 과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혼이라는 풍파 앞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것은 외로움이라기보다 거대한 공포였다. 내가 겪을 수 있는 불안의 최대치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어린 두 아이와, 같이 운영하던 회사까지 내팽개친 채 전남편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낙하산도 없이 공중 투하된 기분이었다. 양손에 두 아이의 손을 꼭 쥔 채로.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하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태어나 처음으로 나는 주저앉아 비참하게 울었다.
배신감보다 더 큰 압도적인 공포 앞에 항복한 눈물이었다. 내 아이들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까 봐 너무나 무서웠다.
공포가 가슴까지 차올라서 숨쉬기도 어려웠던 어느 날, 인천에 사시는 친정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응, 나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 아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그다음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응, 그래. 나다.” 다시 들려오는 아버지의 단순하고 명료한 대답.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보았지만 “아빠……” 외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섭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집이니? 내가 지금 네 집으로 가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아빠, 회사 아니세요?”
“괜찮다. 다 끝났다. 40분이면 가니까 집에 있어라.”
거짓말처럼 40분 만에 아버지가 오셨다. 식탁에 마주 앉은 나는 생전 처음으로 모든 무장을 해제한 채 아버지 앞에 엎드렸다.
“아빠, 나 지금 죽을 것 같이 힘들어. 너무 무서워…….”
그날은 내가 공식적으로 이혼 의사를 알린 날이자, 태어나 처음으로 용서를 빈 날이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으로 밀어붙였던 결혼이었기에,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던 그분에게 진심으로 빌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눈물 섞인 고해성사였다. 누구에게라도 용서를 빌고 싶었고, 누구라도 좋으니 내 밑바닥을 보고도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때,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신(神)과 같은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 이 일을 다시 무르지 마라. 내가 돈은 없지만 네 아이들까지 아빠가 책임질 테니, 그냥 내 밑으로 돌아와라.” 일흔일곱의 아버지가, 이혼을 결정하고 통보한 딸에게 건넨 대답이었다.
그 말은 내 영혼을 짓누르던 수만 가지 사슬을 단번에 끊어냈다. 평생을 거절당할까 봐, 비난받을까 봐 마음 졸이던 아이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온전히 수용된 순간이었다. 내 가장 추한 밑바닥을 내보이고 두려움에 항복했을 때, 아빠는 비난 대신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요새가 되어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아토피라는 감옥에서도 진정으로 해방되었다. 피부가 엉망이든, 누군가 나를 혐오하든, 내 외모나 경제적 능력 혹은 학벌이 어떻든, 내가 이혼녀이던, 내 아이들이 편부모 가정이던,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내 인생의 가장 큰 권위자인 아버지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괜찮다”라는 사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던 마음이 멈추고, 주어진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완전한 항복’이 이루어졌다. 그 뒤로 나는 흔들리지 않은 마음으로 이혼을 절차대로 진행할 수 있었고 홀로 하는 두 아이의 양육에도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괜찮다. 우리는 괜찮다." 이 마음이 정말 우리 세 가족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고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막연하게 멋진 성공을 꿈꾸거나, 다시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지도 않는다. 기도가 멈춘 자리에는 더 넓고 따뜻한 소망들이 피어났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 그 아이들이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부모님이 오래도록 곁에 머물러 주시는 것, 그리고 내 일로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기여하는 것. 이제 내 삶의 목적은 불안과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자유롭다.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고단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이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기에.
“그럼에도 내 삶엔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고통의 긴 터널이 나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이다.
그렇게 본다면, 어린 시절부터 고질병을 낫게 해 달라던 나의 기도는 진짜 이루어진 셈이다. 나는 더 이상 그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이제 내 결핍도, 갈망의 대상도 아니기에.
타고난 신체적 고통은 "완전한 수용과 항복"을 배우기 위한 과제였을까... 신은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