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니란다.

by 서이든

어느 날 밤, 내 팔베개를 베고 누운 나의 8살 딸 리아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엄마, 결혼 안 하고 그냥 애기만 가져도 괜찮아?”

“응? 뭐... 안 될 건 없지만 보통은 가정을 먼저 만들지. 왜, 리아는 결혼하기 싫어?”


잠시 망설이던 리아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나는 평생 엄마랑만 살 거야. 근데 애기는 갖고 싶어. 엄마랑 같이 키우게.”

“에이, 그건 아니지. 나중엔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그럼 그 사람이랑 아기를 낳아서 같이 키워야지.”


그러자 아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 아니야. 결혼 안 할래. 내가 결혼해서 엄마처럼 이혼하면 어떡해. 그냥 안 하는 게 낫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삶의 흔적이 아이에게 ‘사랑은 실패할 수 있는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준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아이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로 말을 이어 나가야 할지 바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수식어나 변명 대신, 가장 솔직한 ‘고해성사’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리아야, 엄마는 아빠랑 결혼한 거 후회 안 해. 우린 만나서 정말 기뻤고 행복했거든. 그러니까 오빠랑 너 같은 아기가 태어났지. 그리고 아빠랑 같이 너네 키우는 시간도 너무 좋았어.”


그러자 바로 리아가 물었다.

“그런데 엄마는 왜 좋았다가 싫어졌어?”


하... 쉽지 않은 대화가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리아야, 사이좋은 친구끼리도 싸우잖아..."


리아가 말했다. "싸우면 다시 사과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


"그런데 어떤 잘못은 용서하기가 아주 어려울 때가 있어. 그리고 친구라는 이유에서 무조건 참아야 하는 건 아니야. 나를 너무너무 속상하게 하고 아프게 한다면 ‘이제 친구 안 해’라고 말해도 돼. 그래야 너도 너의 길을 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 친구랑 헤어져야 네가 다시 즐겁고 행복할 수 있으니깐."

아이는 눈을 깜빡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나는 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내가 진짜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 중요한 건 억지로 참으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아니야. 그 친구 관계가 너에게 정말로 행복하고 즐거워야지. 엄마는 아빠의 어떤 모습 때문에 많이 속상했어. 더 이상 함께 사는 게 어려울 정도로. 리아야, 사랑이나 우정은 너를 아프고 불안하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러자 연이어 리아가 물었다 "아빠가 무슨 잘못을 했어? 나는 친구가 사과하면 화해하는데... "


"화해는 잘못한 친구를 용서하고 다시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는 걸 말하는데, 엄마도 처음에는 화해했지. 그런데 아빠는 여러 번 같은 잘못을 했고, 엄마는 이제는 화해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아빠랑은 더 이상 예전처럼 같이 살 수 없어. 그렇다고 아빠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싸우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이제는 속상하지도 않아. 너랑 오빠랑 이렇게 지내니깐 좋아.. "


리아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아빠와 매일 싸우고 우는 집보다는 떨어져 있어도 웃을 수 있는 집을 선택했다는 내 고백 끝에 리아는 너무나 단순하고도 명료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엄마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그 말은 나를 위로하려는 빈말이 아니었다. 아이의 우주인 엄마가 평온하다면, 자신도 안전하다는 진심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리아에게 다시 한번 약속한다. 엄마는 삶을 통해 보여줄 거야. 헌신이라는 미명 아래 나를 잃어가는 ‘희생’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 삶은 내가 스스로 선택해 나갈 것이며, 언제나 나를 존중하고 소중히 대하는 따뜻한 환경 속에 나를 둘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훗날 리아가 마주할 사랑 또한, 자신을 갉아먹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아름다운 여정이 되게 할 유일한 방법임을 믿기 때문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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