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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Jan 03. 2024

넉넉한 어른이 되는 법

2024 새해 첫날, 나는 남산에 있었다. 한 해를 여는 첫 날인만큼 갓 떠오르는 태양을 눈에 담고 싶었다. 꼭 신정이 아니더라도 종종 일출을 보러 산에 오르긴 했다. 어둡기만 하던 하늘이 점차 옅어지고 마침내 시뻘건 불덩이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터질 듯한 뒷다리와 함께 지켜보자면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장소 선택을 잘못했다. ‘서울의 봄’과 ‘무빙’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미세먼지 나쁨이었는지 붉게 빛나는 N타워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좀비 무더기 같았다.



한 마리의 좀비가 되어 어영부영 걸어가며 내심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체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늘따라 사람의 됨됨이가 괜찮았다. 일행 A에게 내가 어떻게 답했는가를 보라. A는 본인이 느린 탓에 일출시간까지 정상에 도착을 하지 못할 것 같아 자책하는 중이었다. 그런 A에게 ‘함께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냐’고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는 나는 상당히 낯설었다.



나는 절대로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요즘 깍쟁이’에 딱 어울리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이득을 바라지도 피해를 주지도 않을 테니 당신도 내게 그래야 한다는 입장의 개인주의자. 늦을 것 같으면 혼자 속도를 내 올라가서 기어코 일출을 보고 마는 사람. 그런 내가 무슨 바람이 불어 A와 보폭을 맞춰가며 달래주고 있단 말인가.     


새해라서 생긴 변덕인가 생각하다가, 일출 보는 일이 내게 그렇게까지 특별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쉬는 날에 홀로 북한산에 올라가고 제주도에 간 김에 성산일출봉에서 일출을 보려던 경험들이 있다 보니 오늘 하루 해돋이를 풀코스로 감상하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속이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평선에서부터 달걀 노른자 같은 해가 둥그런 모습을 드러낼 때, 결국 우리는 오르막길 중간에 있었다. 애매한 장소에서 엉거주춤하게 태양을 마주했다. 평소의 나와 다르게 상관없었다. 내일은 내일의 일출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이 늘어날수록 삶에 여유가 생기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친구에게 빵 한 쪽을 나눠준다고 굶어죽지 않는구나, 풋살 대회에서 예선 탈락 후 팀원들과 함께 먹는 만두전골도 꽤나 맛있구나, 느끼다보면 나도 넉넉한 사람이 되어가겠지.



우습게도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실패도 성공도 많이 겪어서 일 하나하나에 목숨을 거는 못난 어른은 되지 않으리라 되뇌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자, 다채로운 경험으로 나를 채워 누군가를 챙길 여유가 있는 멋진 어른이 되자. 또렷하게 솟아오르는 해님을 마주하자니 올해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아서 겁도 없이 그렇게 맹세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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