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D에게 약속했던 직접 쓴 에세이 한 편을 보내기 위해 폴더를 열면서 시작됐다. 내 글이지만 시간이 흘러 상당히 낯설어진 덕에 제삼자의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글들은 당황스럽게도 꽤나 구렸다. 이상하다, 이거 퇴고 끝낸 작품들인데.
나를 탈락시켰던 수많은 공모전 심사위원들의 안목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글이 맛깔나질까. 물론 나는 방법을 몰랐다. 모르니까 그렇게 썼지. 양질의 에세이들을 읽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립도서관에 향했다.
한국수필은 814번부터 818번까지였다. 짐작은 했지만 정말, 매우,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참고할 책들을 고르기 위해 제목부터 훑기 시작했다. 곧 상상도 못 한 난관에 부딪혔다. 도무지 구미가 당기는 책이 없는 것이다. 제목을 보면 하나 같이 이런 식이었다.
- 나는 환경미화원입니다: 그렇구나.
- 힘들지만 애써 살아가는 당신에게: 요즘 힘든 사람이 많나 보다.
- 오늘 다시 나를 사랑하려고 합니다: 파이팅입니다.
읽고자 하는 욕구가 드는 에세이집이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글들은 어쩌다 펼친 거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충 둘 중에 하나였다.
1) 믿고 읽는 작가여서(김혼비가 썼다니 재밌겠다), 2) 글쓴이의 삶이 궁금해서(김연경이 배구를 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해)였다. 그렇다. 에세이는 작가빨이 컸다.
‘나는 엄청난 빵순이다’라는 문장이 박보영이 쓴 에세이 첫 문장이라고 쳐보자. 박보영이 빵을 먹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오르며 대체 어떤 종류의 빵을 좋아할지 궁금해진다. 서울에 사는 차장래 씨가 이렇게 쓰면 곤란하다. 내심 ‘어쩌라고’ 싶기만 하다. 김연아가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적으면 가슴이 찡해지지만 내가 쓰면 ‘누군 대충 사는 줄 아나’ 싶은 것이다.
솔직한 독자의 심정을 겪어보니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무리 여운이 남는 글을 쓰더라도 사람들은 애초에 내 에세이 시선조차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궁금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도서관 탐방은 ‘우선 유명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끝났다.
에세이는 고급 일기다. 일기의 내용보다는 누가 썼느냐가 중요하다. 난중일기나 안네의 일기가 사랑받는 이유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브런치 제목을 두고 어떻게 관심을 끌어 조회수를 높여야 하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쓰고픈 글을 마음껏 적어 내려가며 문장력과 전개 방식이나 차분히 다듬어야겠다. 성공은 소설로 해보는 걸로. 언젠가 ‘끝내주는 하루였다’ 같은 문장만 써도 알아서들 클릭하는 그날을 기다려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