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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장래 Jan 15. 2024

건강하시라는 말, 진심이에요

떠날 준비를 하며

“그럼 나 대신 독서 모임 운영을 부탁할게. 2년에서 6년 정도?”

내가 말하고서도 민망해 웃었다. 이토록 막연한 기간 설정이라니. 2년이면 요즘의 군입대보다도 길었고 6년은 초등학생(13)이 대학교(20)도 입학할 시간이었다. 언제 돌아오고 싶어 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호치민에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을 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며 반성했다. 돌이켜보니 내 연락에는 언제나 목적이 있었다. 보내주신 반찬이 맛있어서든 명절에 가지 못해서든 이유가 있어야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건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절날 장성한 후손1 정도의 역할만 하다가 유일한 손주가 되어 두 분과 함께하자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게서 눈을 떼질 못하셨고 손이며 다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대화 내내 멈추지 않았다. 과연 손주들이 강아지로 불리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조부모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포복절도하며 행복해하셨다. 누가 보면 내가 세기의 이야기꾼인 줄 알았을 거다. 내가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해 주실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20대 애송이지만 이런 사랑은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무릎이 아파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께서는 평소 꺼려하던 운전대를 잡고 지하철역까지 손주를 데려다주셨다. 운전을 하시면서도 빨간불이면 옆에 앉은 내 손을 계속해서 꼭 잡으셨다. 할머니는 뒤에서 계속 내 어깨를 쓰다듬고 계셨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불안감이 형체를 잡기 전에 애써 휘저어 날려 보냈다.








지하철역에서 내리고 조부모님께서 탄 차가 멀어지고 나니 청승맞게도 눈물이 났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펑펑 울었다. 함께하는 시간을 그간 헤프게 써서 벌을 받았다.



식사 중 할아버지께서는 베트남 가서 옆 사람과 해보라며 의미 모를 손모양을 알려주셨다. 아마도 치매예방센터에 배운 손동작이었을 것이다. 분당선에 앉아 얼룩진 눈물을 볼에 그대로 얹은 채 오늘 배운 손 모양을 얼른 복습했다. 세상에서 낙오당한 느낌이 들 때마다 손가락을 괴랄하게 엮은 이 동작을 혼자 몇 번이고 할 것임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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