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문장은 정말이지 이것뿐일 것이다. 특히 남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입장에서는.
온통 흰 피부에 밝은 머리칼의 사람들뿐인 이곳에서 낯설고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럴 때에 가장 의지가 되는 것은 단연 일본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 30분 동안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들으며(언어가 짧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곳에서 방영하는 TV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거나, 로컬 음식 등을 이야기하면 특히 더 동화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빵만 우걱우걱 씹어댈 때,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일본인들과의 대화는 마음이 놓이고는 했다. 그리고 이들을 비롯해 학원 등에서 알게 된 대부분의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더욱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또한 아직까지 그 외 아시아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일본 사람들과 더 친해진 이유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인구 많은 중국인도 주변에 없었으니.)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 사람들에게서 한국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곤 했다. 사소하게는 "나 잡채 너무 좋아하는데, 잡채 만들 줄 알아?" 라거나 "너 한국 식재료는 어디서 주로 사니?"와 같은 것부터 조금 더 들어가서는 "너 작업할 때 한글(정확히 'hangul'이라고 이야기 한다.)은 어떻게 입력해?"와 같은. 한국에 대한 그런 관심들은 언제나 즐거웠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 알 수 없는 묘한 찜찜함이 남아 있던 것은 아마도 역사 때문이리라. 이들이 내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잘못한 것은 없지만, '넌 일본 사람이잖아'라는 생각은 (티는 안 냈지만) 늘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마키도 내게 그런 '일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기 전까지.
어느 날 마키가 한국에 여행을 간다고 내게 말했다. 곧 돌아온 마키는 "나 한국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라며 식사 요청을 해왔다. 역사라니, 한국인이지만 한국 역사에 대해 잘 모를 때가 많아 부끄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부끄럽지만, 학창 시절에는 역사가 그리 지루할 수가 없었다.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지만.)
마키는 내게 DMZ 등 한국 여행 후기를 들려주면서 본인이 새롭게 알게 된 한국에 관한 사실 등을 이야기 하고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말하기 껄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해 어떻게 배우니?"
"너도 알다시피 일본을 빼놓고는 아마 한국 근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을 거야. 한국을 식민 지배한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일본이 한국 사람의 성(姓)을 강제로 바꾸고, 위안부를 끌고 간 것 등이 책이나 뉴스 등에서 다뤄지고 있어. 특히 위안부 문제는 지금도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고."
마키는 그런 역사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솔직히 말해 자신은 자국 내에서 이런 역사에 대해 배운 적이 없어 밖에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직접 공부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 세대만큼은 자신들의 윗세대가 어떤 일들을 자행했는지 알고 있으며, 결국 자기 세대가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아가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이날 마키와의 식사는 내 마음속에 있던 찜찜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달까.
나라 밖에서 더욱 크게 느껴지는 친밀함, 그리고 이와 동시에 느껴지는 찜찜함. 하지만 마키의 말대로 앞으로 우리 세대의 노력으로 양국이 더 가까워질 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