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프코리아 김혜란 상임이사 인터뷰
자연목장이 올해부터 우프 호스트가 됐어요!
지인 목부의 SNS에 올라온 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농가를 찾아 노동과 숙식을 교환하는 ‘우프’를 하려면 꼭 국제선 티켓을 끊어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에도 우프가 있었다니!
우프 하러 굳이 유럽행 티켓을 끊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 뿐이었다.
이런 소식에 농업과 농촌을 이야기하는 내가 국내 우프를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로망’ 가득한 우프를 막상 해보니,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좋은 경험이 없었다.
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단편만 경험하고 돌아가는 하루 짜리 체험 프로그램과는 달리, 내가 직접 농부와 관계 맺고 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함께 생활해보며 영농부터 생활까지 구석구석 엿볼 수 있는 기회.
함께 일하고 밥 먹고, 관계를 맺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으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훨씬 생기 넘쳤고, 밀도 있었다.
에디터가 직접 우핑하며 보낸 시간
그러면서 내가 왜 우프를 몰랐을까, 한국 우프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머리 속에 가득 떠올랐다.
내친김에 한국 우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1999년부터 지금까지 우프코리아를 이끌어 오고 있는 김혜란 이사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우프코리아 김혜란 이사를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계동길의 한옥 게스트하우스 ‘곳’.
우프코리아와 그에게 많은 사연이 있는 공간이다. 처음엔 김혜란 이사의 개인 공간이면서 우프코리아 사무실이기도 했다. 또, 우프코리아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했을 무렵 수입을 마련했던 게스트하우스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와 우프코리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인연 이야기와 한국 우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도심 한복판에서 농업・농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스트하우스 ‘곳’에서 마당의 허브를 다듬는 김혜란 우프코리아 상임이사
Q. 우프코리아가1997년에 생겼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쉽다.
우프코리아가 설립된 때 ‘해외에 나가서 공짜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에 포커스가 맞춰져 미디어에 소개돼 주목 받은 적 있다. 그래서 우프 코리아를 찾아오는 내국인들에게 그런 요구가 컸다.
초기에는 해외 우프를 활용해 우프 하기 전에 영어교육을 하고 해외 농가로 연결해주는 업무를 주로 해왔다. 한국 우프를 찾는 외국인도 1년에 10명도 안됐고, 당시 유기농 이상의 조건을 충족해야만 호스트가 될 수 있는 우프의 정책에 맞는 농가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Q. 지금의 우프와는 너무나 다른 형태라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지금처럼 우프 정신에 맞는 운영을 시작하게 된 건가?
내가 1999년에 인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 형태를 그대로 물려받아 업무를 했는데 일 할수록 이 업무를 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10년 전부터 농가를 찾아 노동과 숙식을 공유하는 형태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Q. 수익모델이 확실한 상태에서 쉽지 않았을 텐데.
(앞서 말했듯) 내가 인수받은 1999년에는 ‘유기농’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진 개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정체성에 맞는 농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소셜미디어가 활성화 되지도 않았고. 하지만 우프 코리아의 몇 안되는 농가에서 외국인들이 봉사하며 농가에서도 너무 좋아했고, 외국인에게도 ‘한국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는 피드백을 받다 보니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우프의 정신을 지키는) 방향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2009년 농림부와 컨택했고 그때 공무원 한 분이 너무 공감하며 우리 단체를 1년동안 지원했다. 그 계기로 사단법인으로 바꾸며 기존에 하던 업무는 그만두게 되었다.
Q. 그렇다면 10년 전부터 한국인도 국내 우프에 참여하게 된 건가?
당시 한국인들에게 우프를 이야기하면 ‘왜 돈 안 받고 공짜로 일해줘?’ 이런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내국인에게 오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사단법인까지 만들었는데 외국인을 대상으로만 운영하는 것에 대한 마음에 동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국인에게도 오픈했고, 그렇게 된건 5~6년 정도 됐다. 그래서 많이 모르시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작년 초에 공중파 다큐에 우프가 소개된 적 있었고, 시청률이 꽤 높았다. 웹사이트가 3번 다운돼서 내심 기대했는데 막상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은 3명 이더라. 역설적으로 그때 조금 자유로워졌다.
Q. 30명도 아니고 3명이라니, 너무 적어서 놀랐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자유로워졌다는 건가?
‘우프가 좋고 싫고를 떠나 당장 우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너무 조급해 하지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프는 문화다. 전 세계적으로 우프가 발전된 나라를 보면 선진국이다. 단순히 노동의 가치 뿐 아니라 우프를 할 수있는 삶의 여유가 동반되어야 발전할 수 있는 거라 어느 한 쪽이 발전한다고 해서 가능한 건 아니다.
Q. 우퍼 뿐 아니라 호스트도 여유 없기는 마찬가지 일 텐데.
맞다, 그래서인지 일부 호스트들은 과거 농번기에 우퍼에게 장시간 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삶 자체를 농사에 몰두해야 할 시기에 어쩔 수 없이 우퍼를 방치하기도 하고, 우퍼도 (바쁜게 눈에 보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함께 고된 노동을 하기도 하고. 인간적으로는 이해 가는 부분이지만, 그러다보면 우퍼는 번아웃 된다. 그럴땐 사무국으로 바로 연락하면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사무국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국이 전반적으로 워낙 일이 많은 편이다. 단순히 노동현장 뿐 아니라 농부들도 치열하게 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구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관리・감독을 했고, 요즘에는 그 이슈로 연락이 오지 않는다.
Q. 그래도 인식이나 문화가 변화하는게 느껴지나?
기본적으로 우프가 지향하는 건 농가에서 1~2주 정도 시간을 보내며 농가와 그 지역을 충분히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우프가 알려지는게 조금 더디더라도 우프의 정신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현상은 와 닿는다. 막상 10년 전만 해도 ‘왜 거기 가서 돈도 안 받고 일해’ 이런 반응이지 않았나.
지금은 우프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 많은 사람이 우프의 활동에 공감해준다. 그것이야 말로 큰 변화라 생각한다.
Q. 수익사업을 포기하고 우프의 정신을 따른지도 오래됐는데, 그간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 궁금하다.
사실 사단법인으로 전환할 때 지원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사비를 들여 운영하는 일이 많았다. 이 공간도 처음에는 가정집이면서 사무실로 쓰며 게스트하우스로 얻은 수익을 우프코리아를 운영하는데 썼다. 작년부터 적자가 나는 상황을 면해서 게스트하우스는 우프코리아와 분리했다.
결국에는 자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Q.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결국 우프의 형태를 갖췄고, 지금은 해외처럼 활발하진 않아도 잘 운영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지금 한국 우프는 다른나라 우프랑 어떻게 다른가?
한국인 우퍼가 많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퍼 중 75%가 외국인이다. 통계를 내 보면 미국, 프랑스, 싱가폴, 태국 4개국이 1~4위인데, 보편적으로 미국인, 프랑스인들이 많이 온다.
Q. 외국인 우퍼들의 피드백이 궁금하다.
전체적으로 외국인이나 내국인이나 만족도 높은 곳은 똑같다. 그런데 외국인은 언어에서 오는 한계가 있다보니 농가에 갔을 때 숙박시설과 주변의 액티비티나 편의시설에 대한 평가도 많이 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농부가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다.
Q. 한국인들은 말이 통하니까 다른 부분을 더 많이 볼 것 같은데.
한국인들은 한국의 문화가 익숙하니 농부의 철학 같은 호스트에 대한 평가가 더 많다.
우프 호스트 대부분이 50~60대들이다 보니 그들도 청년이 왔을 때 삶의 메시지를 많이 던지려 노력한다. 그런 관계 속에서 감흥을 얻는 우퍼들이 많다.
Q. 농부들도 우프로 외국인만 만나다 내국인을 만나니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
처음에 내국인을 받는다고 했을때 거부감을 보이는 호스트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내국인이 진지한 마음으로 농촌에 가다보니 일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다. 그에 따른 만족감을 느끼는 농부도 많아졌다.
호스트도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 단순히 농사일이 많다기 보다는 자급자족 하는 삶에서 문화교류가 목적인 분들도 있다.
Q. 우프를 한 곳만 체험하고 왔고, 한국 농업이 계속 어렵다는 담론만 대부분이니 호스트도 문화교류를 원한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호스트는 어떤 팀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우프 호스트는 기본적으로 유기농 이상의 농사를 지으며 농사에 대한 철학이 분명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호스트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자급자족농이다. 작물을 생산해서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목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급자족할 목적으로 이웃에 나눠주는 사람이다. 호스트 중 15% 정도가 자급자족농이다.
2단계는 함께 노동하고 판매까지 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농가다. 우퍼도 판매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3단계는 대규모 교육농장, 체험농장, 외부인이 많이 오는 농장이다. 그런 농장들은 규모가 훨씬 커서 우퍼(특히 외국인)가 함께 있다는 것이 홍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큰 틀에서 세 형태의 농가를 섭외해 밸런스를 유지한다.
Q. 귀농・귀촌을 마음에 담고 사는 편이라 그런가, 나처럼 농업과 농촌에 관심있는 입장에서는 현실을 깨닫는 데 국내 우프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피드백을 한 기억에 남는 우퍼가 있다. 그중 한 친구를 꼽자면 한국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고시를 준비하던 친구였다. 그러다 우프를 알게 되어 여러곳 다니다 ‘그동안 나에대해 잘 모르고 살았다’며 고시를 그만두고 귀농할 계획을 세웠다. 지금은 해외로 우핑을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우프를 하며 농업과 관련된 센터로 진로를 찾아 취업 한 친구도 있다.
Q. 막상 우프를 해보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인간적으로 관계를 맺었고, 나중에는 친구가 되어 헤어졌다. 이런게 우프의 장점일까?
농촌에서도 농번기에는 노동력을 구해주는 단체가 있다. 좋은 취지라 생각하지만, 돈이 개입되다 보니 트러블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우퍼도 무급 노동을 하지만, 호스트 입장에서는 외지인을 맞고 농사를 알려주는 것이 정말 큰 에너지를 들이는 행위다. 우프의 경우 돈이 개입되지 않으니 서로의 고마움을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또 우프 호스트를 섭외할때, 유기농 이상이면서 농사와 삶의 철학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런 취지에 공감하며 참여하는 활동이다 보니 서로 만족도가 높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도 흥행했고, 농림부 정책이 청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결국에는 다 돈 이야기 뿐이다. 그게 너무 안타깝다. 농업은 돈으로 유혹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라 생각한다. 삶과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삶의 철학이 필요하다. 설령 돈으로 유인한다 해도 얼마 못간다.
귀농·귀촌에 관해서는 많은 무료행사나 수업이 있는데, 우프는 자신의 교통비와 시간을 들여서 간다. 공무원들은 이걸 신기하게 바라보지만 우프의 취지에 공감해 참여한 사람들은 만족감이 높다. 참여한 청년들은 대부분 진로와 미래를 고민하며 도시와는 다른 관계와 자연 속에서 위로 받고 오기도 하고, 농촌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으로 찾아가 농촌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피드백을 전해준다.
우프는 여행이 하나의 길일 수 있고, 귀농·귀촌 전에 경험을 쌓으며 농촌을 긍정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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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롬 기자 arom@hellofarm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