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부터 사장까지, 베테랑 게스트하우스 운영자의 제주 정착기
2012년 초, 첫 직장을 퇴사하며 영혼까지 탈곡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제주행 티켓을 끊은 적 있다.
그때 독특한 소개에 끌려 덜컥 예약해 며칠을 보낸 게스트하우스의 설명은 이러했다.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 단, 왕의 손님으로서 국빈급으로 모실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무뚝뚝한 유지현 매니저는 당시 지나친 친절함이 디폴트인 서비스업계에서는 신선한(?!) 캐릭터였다.
그렇지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담백하게 꺼내고, 투숙객을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챙겨줬던 그의 마음 씀씀이와 며칠간 나눴던 대화의 밀도는 6년 뒤인 지금까지 꾸준히 안부를 물어보게 만들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땐 제주의 정체성이 물씬 풍기는 커다란 야자수 정원이 있는 금능 게스트하우스 ‘유지공간’의 대표가 된 그.
지나친 친절을 앞세우기 보다는 손님을 동등한 태도로 대하지만 불편한 것 없이 사려 깊게 챙기는 태도는 여전했다.
그런 그와 저녁에 6년 만에 맥주 한 잔 하며 연고 없이 찾아온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시작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상이 못 생겼거든요. (웃음) 서울 살 땐 오랫동안 머리를 관리해 준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제주 미용실에서는 자꾸 무서운 형님처럼 머리를 다듬어 줘서 셀프로 자르기 시작했어요.
게스트하우스(게하)가 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서울에서 해볼까 고민했는데 당시(2008년)에는 ‘도시민박사업자’라는 가이드가 없어서 도시민박이 불법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회사 다녔죠. 그러다 2011년 여름에 지인들이랑 제주도에 놀러왔는데 게하가 있어서 4박5일 동안 지냈어요. 하필 제 생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낯선 사람들이 제 개인적 이벤트를 함께 축하해 준 것이 강렬하게 남더라고요.
그 뒤에 다시 취직을 해야 하는데 내 손가락이 구직사이트 대신 검색사이트에서 제주도를 검색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안되겠다 싶어서 통장을 확인해보니 200만원 정도는 써도 괜찮겠더라고요. ‘200만원이 떨어질 때까지만 생활해보자’ 하고 그해 10월 말에 내려왔죠. 그렇게 제주살이가 시작돼 버렸어요. 분명히 답사가 목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살이의 시작이었죠.
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준 쫄깃센터를 가서 가만히 게스트하우스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 여자 스텝들에게 ‘변태 스토커’로 오해받기도 하고, 몇 달간 서쪽을 답사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다음해 3월 쯤 우연히 갔던 게하에서 유급 일자리를 얻었어요. 제대로 일을 배울 기회라 생각해서 바로 시작했어요. 거기서 4개월 동안 일하면서 봤던 동네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곳이 협재, 금능이더라고요. 그래서 금능에 집을 구하고 살기 시작했죠.
맞아요. 연세 210만원 줬어요. 지금 시세로는 엄청 싼데 그 당시에는 비싼 편이었어요. 왜냐면 농가주택 안거리, 밖거리 창고 세 채 짜리를 통으로 빌려도 다른 형들은 130에 빌렸거든요. 그런 집 두고 저는 원룸 10평짜리를 비싸게 빌렸으니까. 그래서 형들이 저 보고 미련하다 했는데, 저는 정보가 없었으니 서울 월세 생각하면 너무너무 싸다 생각하며 그냥 들어갔어요. 4개월 동안 번 돈도 연세를 내고도 남으니까 ‘나는 금릉에서 게스트하우스 해야지’ 하고 눌러 앉았어요.
금능에서 살면서 친분이 생긴 게스트하우스 일을 일종의 ‘대타’로 도와줬어요. 그러다보니 일이 1주일~1달 간격으로 들어왔죠. 그리고 그땐 게스트하우스를 직접 지을거라 생각해서 때문에 막노동 잡부 쫓아다니면서 배우고 주변에 카페 일하는 분들도 서비스업 지식이 있으니까 직원이 그만두거나 휴가 가면 1~2주일씩 도와주면서 용돈벌이를 했어요. 대신 메인 수입이 없기 때문에 엄청 검소하게 살았어요. 그런 기간이 2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수입이 적을 땐 집에서 직접 밥 하고 간장이랑 참기름으로 비벼 먹고 살았어요. ‘돈 만원 쓰면 등 하나 못 단다’ 이런 생각으로 버텼어요. 버티기를 못하면 부모님 밑으로 들어가 재취업 해야 하니까 무작정 버텼죠.
그 기간에 자주 가는 게하에서 일을 도와주다 한 손님이 호감을 표현해 주셔서 연애를 하기도 했는데 헤어지고 나니까 이별의 슬픔을 너무 오랜만에 겪었어요. 그때가 2014년이었는데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빨리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초심을 찾아야지. 나는 게스트하우스를 하러 왔어’ 하면서 찾은 게 지금 유지공간 건물이에요.
당연히 그때 계약을 못 했죠. 알고 보니 집이 많이 비싸더라고요.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집 값이 점점 내려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 집 주인이 내건 조건에 옵션이 있었는데 그게 부담스러워서 오랫동안 계약 진행이 안됐던 거였어요. 이 집에 항아리랑 물허벅(해녀가 물긷는 항아리), 수석이 있었는데 같이 처분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 물건들 가격만 수천만원이라 아마 이전의 계약자에게도 부담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물론 저도 “그 부분이 부담스러우니 저도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했죠. 그리고 며칠 후에 전화가 왔어요. “이걸 빼면 계약하겠냐”고요. 그래서 가격이 얼마냐 물어봤더니 처음 가격 보다는 3천만원 정도 저렴해 졌어요.
다시 흥정하고 수중에 있는 돈 다 털고, 부동산 중계인 도움을 받아서 이자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은행에서 대출 받고 마이너스 통장도 개설해 계약금을 치뤘어요.
이 집은 23년 된 벽돌집이고, 굉장히 튼튼하게 지어진 집이에요. 이국적이고 고풍스런 점이 있었어요. 그 분위기를 살려서 게하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한번 살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더라고요.
6월에 내 집이 됐는데 두 달 살아보고 가을부터 공사 해야지 마음 먹었거든요. 그렇게 7~8월을 살아봤는데 지네, 바퀴, 오만 벌레가 다 나오더라고요. 우리 어머니가 마루에서 주무시다 지네한테 물렸는데 손님한테 이런 일이 생길 걸 생각하니 끔찍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아보니까 방역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래요. 벌레가 20년 이상 알 낳고 자랐을 집이니까요.
그래서 같이 막노동했던 목수 형한테 물어보니 “골조 빼고 싹 털어낸 다음 다시 박스를 짜서 배관이랑 전선도 바꾸면 깨끗해지니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뜻하지 않게 이렇게 리모델링 하게 된 거죠.
간장밥 먹으면서 안 쓰고 버틴 돈과 집에서 끌어왔어요. 육지 살 때도 소비를 워낙 안 하긴 했어요.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목수 2명이랑 작업 하면서 잡부 역할을 제가 다 했어요. 공사가 끝난 뒤에 목수형이 말하기를 제 혼자 3~4명 분의 일을 했대요. 그렇게 공사 기간만 8개월 걸렸어요. 정말 힘들었지만 큰 그림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투자해야하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버텼죠. 그리고 몸이 고장 났어요. 10kg짜리를 못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시간이 지나니까 낫더라고요. 1년이 지나니까 예전과 같은 상태가 됐어요.
대신 돈을 아끼려고 인테리어도 한방에 같이 했어요.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건 자신이 없어서 스타일을 엄청 단순하게 했죠. 전부 직각, 수직, 수평으로 자잘한 무늬 하나 없이 투박하게 해놨는데 이걸 목수 형이 목수 특유의 감각으로 덜 투박하게 만들어 준 거죠.
(집 지으면 10년 늙는다던데요.) 정말 10년 늙더라고요. 그래도 그걸 해봤더니 골조 빼면 이런 집을 직접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름 재미도 있었고요. 그래서 여유가 생긴다면 틀부터 내가 생각한 디자인으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마 그렇게 할 기회는 없겠지만 말예요.
전 주인이 처음 집 지을 때부터 나무를 이것저것 심어 두신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몇 년간 정리는 못 하신 것 같아요. 처음에는 집 공사하는 것도 힘드니까 정원은 포기 했어요. 숙소니까 잠을 편하게 자는게 1순위이지 않을까 하고 미뤘는데,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어둡고 음침했어요.
마침 식물을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맡겨달라 하시더라고요. “정리할 수 있다, 해보자.” 그래서 온 가족이 다 덤볐어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 올 때 마다 1주일씩 머무르면서 어머니의 진두지휘에 맞춰 정리했어요.
나무 수종이 20년 이상 됐는데 서울에서 아파트에 사니까 너무 큰 나무를 관리해 본 적이 없어서 우리 가족 입장에서는 거대 프로젝트였죠. 지금은 많이 밝아졌는데 아직도 할 게 많이 남았어요. 여전히 어머니랑 여동생이 2~3달에 한번씩 내려와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일씩 와서 정원 일 하다 가고 그래요. 가족들이 이 일을 너무 좋아해서 다행이에요.
아, 우리 정원에도 열대나무가 두 그루 있어요. ‘워싱토니아’라고 엄청 키 높은 야자나무예요. 제주에 가장 많이 있는 열대나무죠. 키가 큰 건 담벼락 위에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시들어서 늘어진 나뭇가지 긁어서 털어냈어요. 이 주변에서 유난히 키가 큰 편이라 길가에 있는 가로수 크레인 올라가서 잘라내는데 큰 태풍이 오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거 걷어내기도 해요. 이제 내가 올라갈 수 있는 높이를 벗어난 것 같아요.
(높기도 하거니와, 엄청 두껍고 거칠어 보이는데요?) 아, 처음에 그 나무들이 넝쿨이 감겨있었어요. 정리하면서 걷어내니까 예뻐진 거예요. 그거 걷어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나뭇잎 줄기 부분에 가시가 있는데 다듬으면서 가시에 찔리면 팅팅 붓고 곪더라고요. 처음엔 뭣 모르고 톱질하다 억센 가시일 줄 모르고… 톱으로 쓱쓱 자르다 “앗 따가워”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초보자들은 위험한 일이죠. 지금은 적당히 요령이 생긴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기적이라 생각할만큼 마당 넓은 집에 살면서 다른 사람이 됐어요.
텃밭은 매년 바뀌는데, 제주도에서 토마토나 고추가 너무 잘 커요. 작년에 고추는 귀찮아서 안 건드렸더니 달린 채로 말라서 결국 어머니가 따셨거든요. 근데 그게 향이 정말 좋더라고요. 깻잎은 이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있었어요. 모았더니 매년 군락을 이뤄요. 올해는 깻잎 꽃으로 장아찌를 만들어보려고요. 아, 초당옥수수도 심었는데 실패했어요.
앵두랑 매실은 매년 열러서 매년 청 담가요. 앵두는 생각보다 꿀물맛 나서 손님들 웰컴 드링크로 내고, 매실은 다 익어서 떨어진 매실만 쓰는데 황매가 향이 훨씬 부드럽더라고요. 작년까진 황설탕 쓰다 지금은 백설탕 써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해보는데 재미있어요.
첫해에는 하루에 몇명이 오든 최소 매일 4시간씩 청소했어요. 그러다 1년이 지나니 청소가 몸에 베어 속도가 붙더라고요. 조금씩 빨라졌죠. 그런데 사람이 게을러지잖아요. 그러다 보니 매일 닦지 않아도 티가 덜 나는 구역, 매일 닦아도 티가 안나는 곳을 알겠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매일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청소해요. 많이 줄었죠. 청소 얘기 하니까 벌레를 잡게 되네요.
제 경험으로는 일하다 보면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요. 그럼 만나서 엄청난 수다를 떨지 않더라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간접경험을 하거나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저희 집에 오는 분들은 보통 쉬러 오세요. 육지에서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어서 탈출하고 싶어서 오는데 그런 분들이 많죠. 듣다 보면 이 사람은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어하며 살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느긋하게 도시의 삶에서 느끼는 고민없이 행복한 것 같은 착각을 느끼는데 그게 나쁘지 않아요. 실제로 도시에서 받는 스트레스 보다는 양질의 스트레스를 받죠.
굳이 예를 들면 회사에서는 이상한 상사가 한 명 있어도 못 벗어 나잖아요. 그게 굉장히 큰 힘듦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혼자 일하죠. 스텝도 없고요. 굳이 나에게 힘들게 하는 손님이 있다고 해도 며칠 묵으면 떠나요.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라 생각해서 나에게 투정을 부려도 받아 낼만 해요. 그런데 저도 한 번 정말 큰 일을 겪긴 했었어요.
네, 유난히 취해서 큰 소리를 냈던 손님이 한 분 있었어요. 다른 손님도 계셔서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죠. 그런데 다시 시끄러워 지고 다시 제가 찾아가 양해를 구하는 상황이 반복되니까 결국 저한테 심한 욕으로 화풀이 하면서 환불을 요구하더라고요.
저도 감정이 많이 상해서 당장 환불을 해 드렸어요. 그리고 ‘늦은 시간이라 다른 숙소 구하기도 어려우실 거다. 나가 달라는건 아니고, 규칙 지키고 주무시면 된다.’ 했죠. 마침 다른 일행이 사과 하길래 ‘친구랑 잘 얘기해보고 그냥 주무셔도 된다. 굳이 나가시겠다 하시면 어쩔 수 없다.’ 했죠.
그런데 만취한 손님이 캐리어로 집 안을 온통 찍으며 굳이 퇴실하더라고요.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는데 말이죠.
정말 오만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네 다른 게하 형한테 ‘미안하지만 전화해도 될까?’ 묻고 이야기 했죠. 그 형도 게하를 직접 운영한지 4년차여서 만취한 손님들과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다 보니 좀 진정이 됐어요.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니까 ‘그 손님들 잘 데도 없을 텐데 돌아오지’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스스로 어이가 없었어요. 좀 전까지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손님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이걸 정말 하고 싶어하는구나, 손님 챙기는 걸 좋아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게스트하우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3인 이상 무리가 오면 사고날 확률이 높아진다’고요. 컴플레인도 높고요. 무리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게하 특성상 다른 무리랑도 같이 지내야 하잖아요.
저처럼 스텝 없이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3인 이상 예약하는 손님은 피하게 되더라고요. 너무 다수의 손님이 오면 게하 입장에서는 목돈 벌어서 좋을 수 있지만 내가 감당 못하면 안 받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으니까요.
2016년 1월에 40몇년만에 폭설이 왔어요. 제주 해안에 눈 쌓이고, 공항도 마비 됐고요. 떠나는 손님은 못 나가고 들어오는 손님도 못 들어오고, 도에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어떻게든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됐죠.
그때 10일 가까이 연장하게 된 손님도 있었어요. 그 분들이랑 같이 차 타고 읍내에 어떻게든 나가서 점심 먹고, 물류가 없어서 살 것도 없는데 찾아 찾아 장 봐가서 뭐 해먹었어요. 역경을 같이 이겨낸 사이라, 그 손님들은 서울에서 따로 만나기도 했대요. (웃음)
예전에 다른 게하 일 도와줬을 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 정치,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런 인식이 보편적이었죠.
그런데 요즘엔 사회전반으로 페미니즘 이슈, 정치적 이슈로 대화하는게 너무 자연스러워졌어요. 요즘엔 손님들과 얘기하며 정말 많이 배워요. 손님들이 되게 전문적인 지식의 편린을 가져와서 저에게 선물해주고 가죠. 희안하게 제가 그걸 되게 좋아해요. 말하기도 듣기도 좋아하고. 그래서 요즘엔 이런 주제로 이야기도 많이 나눠요. 물론 서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과도하게 뜨거워지거나 상처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호스트 입장에서 제일 좋은 주제는 제주도 맛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웃음) 그런데 제주 관련된 이야기만 하는 것도 매너리즘에 빠져서 매뉴얼이 된다고도 해요. “똑같은 주변 안내를 하루에 3~4번 만 해도 한 달에 120번 정도 하는데 반복된 이야기 하다 보면 나는 숙소에 갇혀있는 것 같다.” 라 말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힘들어서 실수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게 호스트가 손님에 관한 질문하게 되는 거예요. “뭐 하냐”, “몇 살이냐” 이런. 사람이 바뀌니까 호스트입장에서도 호기심이 생겨서 실수 하는 경우가 있죠.
그게 별로라 생각하기도 해서 저는 제 개인사를 다 준비해 놨어요. (웃음) 연애사, 가족사, 학교, 군대, 친구 이야기, 돈... 저를 만났던 손님들이 들은 이야기 종합하면 제가 아는 저보다 더 저를 많이 아실 수 있어요. (웃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 유럽 한인 민박 시스템이 숙식-노동 교환이었어요. 저는 그 문화가 제주도로 들어온 거라 봐요. 제가 경험한 해외 민박은 스텝이라고 부르기 전에 장기 투숙객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썼어요.
문제는 제주는 게스트하우스마다 스텝이 하는 일이 다 달라요. 어떤 데는 청소, 어떤 데는 예약을 받거나, 파티 호스트나 함께 운영하는 부대시설 직원역할을 맡기는 곳도 있어요. 그리고 어떤 게하는 단순히 상주하면서 “이거 읽어보세요” 이정도 기본 안내만 하는 수준이죠. 지금 말하는 걸 하나만 시키는데도 있고, 다 시키는 데도 있어요.
그 중에 하나를 주 사흘 정도만 시키는데 대신에 숙박을 나는 공짜로 누리고 숙식 해결하며 나흘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면, 그런 개념으로 스텝 일 하는 분들은 무급 이슈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안 받으세요.
그런데 그 이상 일을 하거나 운영하는 수준의 노동이 된다면 그 사람은 직원이죠. 당연히 유급으로 일 해야 하고요.
가장 건강한 게하 운영 관련된 스텝의 포인트는 물물교환이라 생각해요. 우프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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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롬 기자 arom@hellofarmer.kr
제주도 금능 게스트하우스 유지공간